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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천 탄생 110주년 기념과 사랑하는 아내 김 ܛ. A을 추도하며

정리: 김 이브게니(김경천의 큰 딸 김지리의 큰 아들)

번역: 정창영(감사원 감사관)

이 글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할머니 유정화와 김경천의 자녀인 나의 어머니 김지리(김 베라 이바노브나), 김 수범(발로쟈 아저씨 김 블라지미르 이바노비치), 김지희(지나 아주머니, 김 지나 이바노부나), 김기범(게나 아저씨, 김 겐나지 이바노비치), 김지란(니나 아주머니, 김 니나 이바노비치)의 기억으로 쓰여졌다.

김경천 출생일로부터 110주년과
사랑하는 아내 김 L. A.의 추념에 바친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할머니 - 유정화와 그 자녀들,
지리 - 나의 어머니 (심 베라 이바노브나 )
수범 - (발로쟈 아저씨) (심 블라지미르 이바노비치)
지희 - 지나 아주머니 (김 지나 이바노브나)
기범 - 게나 아저씨 (김 겐나지 이바토비치)
지란 - 니나 아주머니 (김 니나 이바노브나)
의 기억으로 쓰여졌다.

나의 할아버지 김경천(1885년생)은 5남 1녀(막내딸)의 자녀를 가진 富者이고 화목한 대가족의 5남으로 태어났다. 분배된 토지가 가족의 부를 이루었다. 어머님이 말씀하시길, 유년시절 어느날, 김경천은 서점에 들러 서가의 책을 둘러보다가 "나폴레옹"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책을 읽은 감동은 가슴깊이 강하고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그는 장차 군인 되기를 열망하다가, 이윽고 이를 결심하였다. 그런데, 그의 경우 이를 위해서는 멀리 나갈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증조부, 부친, 숙부가 병조판서를 지낸 武門의 가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의 형들은? 그들 모두 장군이었다. 정말 한 가족에 있어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김경천은 집안의 다섯 번째 장군이었다고 했다. 바로 이러한 生의 熱望으로부터 김경천(외견상으로 그가 조선사람임을 구별하기 힘들었다고 함)은 일본어를 철저하게 익히면서, 지원자들에 대한 면밀한 심사에도 불구하고 일본육사에 입학하였다. 정말 당시의 경쟁률은 100:1이었다.

그 당시 혼란기의 한국은 일본참략의 압제하에 있었다. 어머니의 기억에 따르면, 나의 조부는 당연히 자기 조국의 해방을 갈망하였었고, 조국이 외국침략자의 장화에 짓밟힌, 정말로 많은 고통을 받은 땅, 조국이 그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보는 것을 갈망하였다고 한다.

할머니 유정화가 말씀하시길, 육사 정규졸업생의 명예를 위해 개최된 성대한 夜會에서 김경천은 이승만에게 다가가, 그에게 자신을 한국의 독립에 바치겠다고 제의했었고, 이승만은 이에 대해 "동지, 나는 돈을 좋아한다."고했다. 이렇게하여 나의 조부의 군사적 숙명과 장래의 남한 독재자는 갈라서게 되었다. 즉, 그들은 서로 장벽의 다른 쪽에 있음이 판명된 것이다. 확실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창카이 쉬(장개석? : 譯者註)도 바로 그 학교에서 배웠다고들 한다. 이승만은 이미 코르시카섬에서 노령을 마쳤다고 어디선가에서 읽은 적이 있다.

술을 많이 마셔 격앙된, 이제 막 최상급생이 된 일본인들이, 그들의 생각과 의도로는, 결국 나의 사랑하는 할아버지 김경천의 조국 한국을 예속시킨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장래의 포부를 밝힌 적이 있었다. 김경천은 기회를 포착하여 자기의 동기생들에게 그들의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좋은 놈" (별명이었던 것 같음 : 역자주)이 얻어지게 되었다. 침략의도에 관하여 공개적으로 발언하고 한국점령을 염원하는, 가장 광폭하고 악질적인 일본인은 5명이 있었다.

김경천의 막내딸 지리(지리는 큰딸로서 이 책에서는 주로 "나의 어머니"로 편현되는 바, 지희의 오자로 판단됨 : 역자주)가 나에게 말하기를, 육사 청강생으로 있으면서, 일본인들이 그가 어떠한 범죄를 저지를 소질이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게 하는 믿음을 가질 만큼, 매우 공부를 잘하였다. 김경천은 육사에서 공부할 당시 이미 진심으로 사랑하는 조국을 평안하게 하기 위하여 일본인들을 격멸할 결심을 하였다. 김경천은 육사 졸업장을 받고 난 후, 상당한 이유를 제시하면서 육사교장에게 휴가를 청원하는 신고서를 제출하였다. 신고서는 수리되었다. "휴가"기간 동안 김경천은 악랄한 외국인, 즉 일본인에 맞서는 한국인들 가운데서 빨치산활동요원의 선발, 준비에 전념하였다. 동시에 그는 토지를 팔아치웠으며, 그 자금은 광명에 찬 미래를 위하여 대한민족의 독립운동의 강화와 확장에 사용되었다. 그 무구한 역사의 기간동안 끊임없이 증명되어온, 자유를 사랑하는, 능력있는 민족을 위하여......... .

이와 유사한 "휴가"는 육사에서 김경천의 명의로 2번 이루어졌다. 더 이상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이후 김경천은 자기의 생명과 어쩌면 자신의 동지들(무장한 용기있는 친구들)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한 번이 아니라 정말로 여러번, 일본인으로부터 숨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본인들은 그를 육체적으로 고통을 주기 위하여 그를 수색하였다. 그들은 수년간 그가 종전에 살았던 집 주위를 지칠 줄 모르게 감시하였다. 김경천이 나타날 것을 바라면서...... .

일본식 拷問(사람에대한)은 이 세상에는 다시없는 가장 놀라운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지희가 말하기를, 실제활동을 위하여 김경천에게는 군사서적이 필요하였다. (그의 집에는 많은 장서가 있었다.) 이를 위해 한 여인이 파견되어 왔는데 그녀는 일본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되돌아 가지 못하고, 진짜 영웅과 같이 잔혹한 일본인들의 고문을 받아 殉死하였다. 그녀와 조국에 자기를 바친 모든이에 대한 좋고도 영원한 추억...... .

할머니 유정화도 나에게 유사한 경우를 말씀해 주셨다. 어느날 일본인들은 끊임없이 김경천을 찾으면서, 일본인들을 피해 험한 산들로 이어지는 산악지대를 건너 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를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총알이 바로 옆을 스쳐가면서도 그를 비켜 날아들었다. 그러나 김경천은 산꼭대기에서 추적자들을 따돌리면서, 산꼭대기로부터 흘러내리는 강(두만강이나 압록강을 지칭하는 듯함 : 역자주)을 건넜다. 이렇게하여 그는 일본인들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이와같은 에피소드를 말하면서, 나의 할머니인 자기의 아내 유정화에게 "내 인생에 있어서 그와 같은 사건을 겪었으니, 나는 반드시 오래 살 것이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막내딸 지희의 얘기에 따르면, 자기의 육체적, 친성적 소질의 덕분에, 김경천은, 매우 빠른 순발력과 강한 다리를 가졌으며, 일본의 自衛手段을 알고 있었다. 그가 포로로서 일본인들의 손에 체포될, 피할 수 없는 위험으로부터 여러번 위기에 봉착하였을 때, 한 번은 세 일본인으로부터 추적당하여 달리는 열차의 객실에서 뛰어내리기도 하였다 한다.

그의 인생은 1937년에 감금되는 등 커다란 슬픔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당시에는 이유없이 많은 수의 한국인들이(한국인이 아닌 자들도) 잘못도 없이 고통을 당했던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나의 어머니의 얘기에 의하면, I. B.스탈린이 김경천에게 직접 두 번이나 훈장을 수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했던 것이었다. 예전에 어머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하신 적이 있다. 김경천이 체포되고 난 이후, 세아이(나이가 많았던 딸들 중)를 내무인민위원회로 호출하였을 때, 그들 중 한명인 지혜(뉴라 아주머니)는 "나는 어떠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라고 명백히 말하였었다. 이에 대해 한 장교(위원회 위원)가 매우 정중하게, 절도있게 김경천의 자식들을 주목하고서는 소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얘들아 안심하여라. 우리는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으로 심리하고 있으며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방면하였다.

1937년에 감금된 김경천은 코미自治소비에트社會主義共和國(모스크바기준 북동쪽 최상단부에 있음 : 역자주)으로 보내어 졌다. 1941년초 유정화는 그로부터 그는 잘못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심문하지 않았으며, 그때는 대조국전쟁(제2차 세계대전 :역자주)이 시작되는 기간동안의 실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내용을 알린 수통의 편지들을 받았다. 그리고는 편지가 중단되었다. 유폐되어 10년간 금고 되었다가 풀려난 목격자가 그는 김경천과 함께 一殷共同舍에 있었었다고 알려주었다. 그 감방에서는 모두가 그를 존경하였고 말을 따랐었다고 했다. 그는 그 당시 그와 같이 있던 모든 이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아침운동을 하였었다고 한다. 그는 확신에 차 있으며 자유롭게 처신하였다. 그러나 어느날 감옥소장이 그를 불렀고, 그후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었다.

어느 여름날, 할아버지 김경천은 자기 뒤로 일본인들의 미행이 있는 걸 명확히 알자, 아내에게 "부인, 내일 여행가방을 준비해 몇가지 물건을 챙겨주시오, 무엇무엇 등...... ." 가족 간의 대화의 방식은 한국의 관습에 따라 항상 정중하였다. 그리고는 대화를 계속하면서 아내에게 권유하기를, 누군가 자기에 대해 묻거들랑 그는 금강산에 사냥떠났다고 얘기해 달라고 하였다. 그 장소는 그 당시 그들이 살던 곳으로부터 먼 곳에 있었다. 덧붙여, 집주인은 3주야 후 저녁 8시경에 돌아온다고 약속하였다.

그 다음날 남편의 출발 후, 한복으로 갈아 입은 일본인 2명이 집으로 찾아 왔었다. 할머니 유정화는 이미 그 만남을 사전에 준비하고 있었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들릴 듯 말 듯한 소리고 남편이 언제 돌아오느냐고 그녀에 물었다. 어떻게 유정화는 그 소리를 알아 들었을까? 왜냐하면 그녀는 일본어에 능통하였기 때문이다. 할머니 유정화는 이 回想속에서 일본인들은 매우 절도있으며 종교적, 즉 미신을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점을 지적하셨다.

정확히 3일 후, 일본인들이 또다시 끊임없이 집으로 찾아 왔었다. 집에는 수색이 시작되고...... .

家庭事의 분주함이 끝나고 조용한 시간에 나의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집에는 금빛 制帽徽章 등을 한 군복차림의 친척들 사진이 있는 두꺼운 앨범이 있었다. 김경천의 형제들을 아주 기억하기 좋은 사진이었다. 물로, 그 모두를 가택수색시 일본인들이 빼앗아 갔었다. 우리에게는 모두 다해봐야 2장의 사진, 즉 민간인 복장의 할아버지(김경천의 30대 사진으로 本書 제 2페이지 사진을 말함 : 역자주)와 자식들(3녀, 그들 가운데에는 나의 어머니도 뾣혔음)의 사진만 보존되었다. 사진 찍을 때에는 나의 어머니가 10살 정도이고 나머지들은 7내지 8살 정도였다. 할머니 유정화는 수색이 있던 바로 그날 감금되었다. 지식들은 그녀로부터 떨어져 집안의 별채의 다른 방에 격리되어졌다. 특무대의 여러사람이 여러차례 하루 내내 그녀를 심문했었다. 그것은 취조로 바라는 결과에 도달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저지른 것이 명백하였다.

할머니 우정화는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말씀하시길, "나는 당시 젊었었고, 남편을 위해 어디로든 떠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 다만 그가 체포되지 않았으면 좋을 뿐, 자식들에 대한 배려는 하지 않았다.

그녀가 감금되던 날로부터 1주일 경과 후, 어디에선가 유정화는 단식을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그녀는 단식 3일간은 매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후 어떤 것이든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러자 그들은, 그녀가 그 냄새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청어를 그녀에게 가져다 대었다. 일본인들은 최고지휘부가 원하지 않는 결과를 두려워하면서, 정말로 낭패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들은 유정화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온갖 수단으로 설득하였으며, 그녀에게 자식들을 가련히 여겨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었고, 그녀에게 쌀죽 "밥"과 다른 한국음식을 가져왔었으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하고는, 심문에 대해 오직 자기 남편은 자기에게 감옥에 갇히는 것이 처음이라고만 말하라고 했다고만 대답했었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와 그녀 자식들의 생명을 구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나타낸, 늠름하고, 용감하고, 의지가 강한 여인, 즉 김경천의 당당한 아내였었다고 말해도 실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나는 그녀에게 "당신께서는 김일성에 대해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녀가 답하기를 "할아버지와 함께 우리가 혁명활동을 시작했을 때, 그는 아직 소년이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뒤 계속하기를, "역사는 핵심인물들에 대해서만 기록되어진다."고 하셨다. 이러한 생각의 의미는 지당하고 명백한데......

할머니 유정화 자신도 부자집 출신이며, 하녀에 의해 교육을 받았었다. 그녀의 전공은 음악(피아노)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녀는 항상 조용하였으며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끝없이 호의를 베풀었으며, 절도있고 신념에 차있었다. 그녀는 많은 종은 인간의 덕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칠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 살아온 전 생애에서(매우 솔직하게 고백하건데) 그러한 사람은 오직 두사람만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할머니 유정화와 그의 큰딸 나의 어머니이다.

할머니는 우리, 즉 손자녀들에 있어서는 두 번째의 바꿀 수 없는 어머니였으며, 자기 자식은 물론, 손자녀들에게 있어서도 진심으로 애정깊은 분이었으며, 잘 보살펴 주신 분이었다. 그것은 일체였으며, 분리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나의 어머니의 얘기에 의해 그녀에게 친 남동생, 아지시(아저씨를 뜻하는 듯:역자주)가 있다는 걸 안다. 아지시 또한 1937년에 고통(강제이주를 말함:역자주)을 받았으며, 그 또한 할아버지 김경천처럼 혁명사업에 종사했으며, 또한 러시아에 있었다. 그는 遠東地城의 신문들 가운데 한 곳에서 일했던 것 같다. 자기의 친 남동생과의 관계에 있어서, 할머니는 자기의 딸 지희에게 말씀하셨다. 어느날, 아지시와 그의 혁명사업동지들이 타고 있는 기선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 났었다. 재난이 닥쳐오는 것을 예견하지 못한 채 갑판위에 서서 사람들이 임박한 앞으로의 여행에 관해 평화롭게 얘기들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 기선의 갑판에는 화물을 들어올리기 위한, 무거운 주조 갈고리가 달린 기중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묵직한 갈고리가 쇠사슬로부터 떨어져 사람들, 즉 아지시와 그의 혁명사업 친구들이 서 있는 갑판으로 떨어졌다. 후에 판명된 바와 같이, 당시 아지시는 누구보다도 그에 가깝게 서 있었다. 갈고리가 떨어지는 것을 보자, 그 아래 서 있는 친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생명의 위험을 부릅쓰면서, 아지시는 친구를 향해 몸을 날렸고, 자기의 몸으로 그를 덮쳤다. 강한 충격이 바로 그의 머리에 가해졌다.

아지시와 같은, 혁명가, 그런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위하지 않는다. 기선에서의 그 사건 이후에, 그는 언제나 심한 머리의 통증에 고생하였다고 할머니 유정화가 말씀하셨다. 그는 끊임없이 지속되는 머리 통증 때문에 죽을거라고 예상하셨다. 또한 그녀가 기억하기로는, 아지시는 김경천에 대해 대단한 정신적 친밀감과 상호 이해심을 품고 있어, 인간적으로서 뿐 아니라 친척으로서 그와 매우 친했었다고 했다. 그는 자기 누나 유정화가 진짜 한국음식을 매우 그리워하자, 그녀를 동정하였다. 그래서 그녀에게 충고하기를, 끓는 물에 소름절인 오이를 잘게 썰어 넣고, 이때 오이절인 소금물은 남긴채, 양파, 고추, 약간의 설탕가루를 보충하고, 이 모두를 골고루 잘 섞으며, 토속 쌀죽 "밥"을 위한 채소반찬이 갖춰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러시아 재료를 섞으면서 그는 그의 여동생(누나의 오자:역자주) 유정화에게 요리 조언을 해주었다.

육사와 모든 "휴가들"(앞에서 기술한 독립운동준비를 말함:역자주)이 끝난 후, 김경천은 한국으로 돌아왔고, 근본적인 활동, 즉 지하혁명으로부터 일본인들의 주의를 따돌리기 위해 "방탕한"생활을 살기 시작하였다. 마치 육사졸업이 그리 중요치 않은 것 처럼. 김경천의 자식들이 그들의 사랑하는 어머니 유정화의 얘기에 의해 기억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주의를 따돌리기 위한 기회들은 다음과 같았다. 당시에는 일본 놀음을 하는 야간 도박장과, 당시 젊은 부부들이 당연히 알고 있었던 유흥클럽들이 있었다. 그러나, 반복하건데, 이 모든 것들은 사전에 숙고한 것들이었고 김경천과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의 사이에 미리 얘기된 것들이었다. 이 모든 것은 인생의 높은 뜻, 즉 그들의 사랑하는 조국을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김경천의 집에는 깊은 밤 자기 조국의 애국자들인 한국인 동조자들이 모이는 지하실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의 압제에 대항하는 계획들을 세웠으며, 그 계획들의 가능성을 실효성있게 구현하였다.

그래서, 유정화의 기억으로부터 김경천의 딸(지희)이 말하기를, "반란을 위하여 김경천이 지휘하고 있는 고국-조선부대는 이승만이 살던 집을 태우기로 결정하였다. 그를 마치 민족의 반역자처럼 체포하여 괴롭히려고 끊임없이 시도하였다. 계획의 첫부분은 이행되었다. 즉, 이승만의 집을 완전히 태웠으며, 그 자신은 여러차례 민족의 복수자들로부터 도망가지 않을 수 없었다. 빨치산 측의 압박은 그로서는 참을 수 없었으며, 그는 한국을 떠났고, 그가 상응한 지지를 받았던 미국에서 허우적거리게 되었으며, 그는 남한의 독재자가 되었다. 할머니 유정화는 기억하기를, 러시아말 한마디도 모르면서,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서 카자흐스탄(제3국영농장)에서 산다는 것은 인텔리 집안에서 성장한 그녀로서는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말린 쇠똥으로 날로에 불을 지피고, 어려운 국역농장의 작업들...... .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국영농장의 지배인은 그녀가 매우 착한 노동자라는 것을 알아 차리고, 국영농장의 목욕탕에 불을 지피는, 보다 가벼운 일을 맡겼다. 그 후에는 국영농장의 온실이 맡겨졌다. 자신을 위한 훈계와 간은 "언제나 자기의 姓 金哥를 더럽혀서는 안되며, 인생을 도둑질 외에는 뭐든지 할 줄 알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말씀을 기억한다.

비밀리 일본인 침략자에 대항하는 한국인 동조자들을 모으면서, 그들은 갖은 방법으로 점령자들과 투쟁하였다. 일본인들이 그들의 조직을 밝혀 내고 그들을 불법상태로 내모는 그러한 시간이 다가 왔었다. 김경천의 친구들은 그와 유정화의 남동생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도주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1918년∼1921년)연해주에서 김경천은 러시아를 위해 싸웠다. 처음 部隊는 30명 내지 60명으로 구성되었다. (딸 지희의 얘기에 의하면) 지속적으로 숫자는 늘었고 김경천은 자신의 군인생활(육사졸업 이후)에서, 그 어느 전투에서도 (크고 작든간에)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즉, 그는 뛰어난 군 지휘관이었으며, 순간적으로 발생된 상황을 파악하고, 전투상황을 분석함과 동시에 승리를 보장하는 결정을 適時에 내리는 능력을 가졌다.

빨치산 시절을 (김 베라 이바노브나와 유정화는)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김경천을 찾아 추적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들은 할아버지의 사진을 신문에 싣고는 김경천을 체포하였다고 기재하였다. 그때, 빨치산들은 할아버지 김경천의 사진이 역시 실린 자기의 신문을 발행하였고, 빨치산 가운데 한사람인 그는 그의 체포, 구금사실을 모두 반박하였다. 사진이 함께 실린 김경천에 관한 기사는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김경천이 손으로 쓴 종이조각과 더불어 빨치산의 通信線을 따라 할머니 유정화에게 전해졌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살짝 알린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번에는 신문에 時가 실리었다. 할머니는 그것은 그의 시, 즉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다.

딸들 가운데 가족의 맏아들이 장남 수범(김 불리지미르 이바노비치)이 태어났을 때, 그 기쁨은 끝이 없었다...... . 그리고 마을에서 모두들 그 소식을 알았을 때(모두들 할아버지를 선생님으로 불렀다.), 집 마당에는 긴 식탁이 갖춰지고, 모두들 가져올 수 있는 모든 먹을 것을 가져 왔었다. 할머니는 진심의 감사와 함께, 바로 그 축제의 기념일을 회상하곤 하시었다. 전 생애를 통하여 기억될 만한, 특별한 유일의 축제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들과 함께 한 무겁고도 긴 그녀의 운명속에서의 행복이었으며, 행운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몇해가 흘렀고...... .바로 그 수범에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었다. 어린 소년은 작은 보트가 있는 호수로 다가 갔었다. 소년은 보트에 탔었고, 보트는 아마 묶여 약하게 무껴 있어서, 소년과 함께 떠내려 가버렸다. 그날 전 마을은 마치 꿀벌통처럼 허둥지둥하였다. 김경천의 외동아들을 찾으면서...... . 저녁무렵 보트를 찾았고, 그 속에는 수범이 조용하고 달콤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그날 호수는 잠잠했기에 그로서는 행운이었다. 다음 날 내내 모두들 이에 대해 위 얘기와 비슷하게 한마디씩 하였고, 부모와 그들의 축제의 "주인공"과 자식들이 오래 건강하게 살도록 祝祭의 床이 차려졌었다.

나의 사랑하는 잊을 수 없는 어머니께서 "우리 아버지 김경천은 매우 엄격하셨다. 군대식이었다고나 할까. 물론 당연히 부모의 입장으로도 자식(딸들)을 키우셨지만."라고 회상하신 적이 있다. 빨치산 部隊는 김경천 가족의 주거생활을 위하여 前 地主의 집을 배당하기로 총회에서 결의하였다. 딸들은 모두 양동이 물이 더러워질 때 까지 집 마루바닥을 닦곤 했었다. 딸들 각자에게는 집에서 해야할 자기의 의무가 있었다. 順從은 확고한 규칙이었다. 매일 아침 김경천은 숲으로 아침운동을 하러 가곤 하였다. 그 이외, 그는 숲속외진 곳에서 指揮口令을 반복하시곤 하셨다. 숲 속의 메아리는 그 口令을 울려퍼지게 하였으며, 그것은 정말 웅장하였다. 김경천은 자기 부대를 위한 노래를 작사하였다. 그 노래에는 당연히 상응하는 선율·멜로디가 따라졌었다. 언젠가(50년대초)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한국인 집에 손님으로 갔을 때, 그녀는 아버지가 지은 노래를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그녀는 흥분하였고, 그래서 집주인에게 그들이 어디서 그 노래를 배웠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이 노래는 빨치산 노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한국말로 된 그 노래의, 아마 정확치는 않겠지만, 한 소절을 기억하고 있는 바, 러시아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이 소리되어질 것이다. "(빨치산이) 얇은 옷 입고 러시아에서 추위에 떨며, 대한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 빨치산부대 내에서 자유로운 시간이 생기면, 축제가 벌어지곤 했다. 할아버지 김경천은 세 딸들에게 빨치산들 한가운데 군대식으로 정열하여 몇곡의 노래를 부르도록 명령하곤 하였다.

1952년에서 1953년 까지 사이의 중반 쯤에 김 마트웨이 티모페에비치(기자)가 우리 가족을 찾아냈다. 그는 매우 키가 크고 여위었으나, 67세쯤 되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카라간다州 출판국 과장으로 일하는 나의 아버지 김 페트로탄구비치 덕분에 카라간다에 있는 우리 가족을 찾은 것이다. 아버지에 대해 잠깐 얘기하자면, 그는 소연방 카자흐스탄 共和國 文化部 직원으로 근무하였던 카라간다市에서는 유명한 사람이다.

김 마트웨이 티모페에비치는 모스크바에서 왔다. 우리 할머니가 생존해 계신다는 것을 알고서, 그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기로 결심하였다. 그 당시 그들은 밤새도록 얘기하고 회상하였다. 김 M. T.를 동방민족대학교에서 修學하도록 모스크바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그 교육기관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러시아 여자와 결혼하여 모스크바市 길랴렙스코보街 어디에선가 살았다. 그는 솔직한 심정으로 처음에는 사람을 쏠 수 없었다고 할머니께 얘기하였다. 김경천은 어느날 그를 불러, 만일 너가 쏘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너를 죽일 것이고, 그 누구도 조국을 지키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담긴 대화를 가졌다고 했다. 바로 이러한 구체적인 부대장과의 대화가 김 M. T.와 김경천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김경천과 유정화의 가족으로는 여섯명의 자녀, 즉 네딸과 두아들이 있었다. 김경천의 막내아들 기범 (게나 아저씨 또는 김 겐나지 이바노비치)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아버지가 군대를 지위할 때, 그가 러시아말에 능통하지 못하여 그의 좌우측에는 2명의 통역자를 데리고 있었다. 통역자들 중 한명은 이반이라 불리워진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추억을 위해 자식들에게 父稱(러시아의 姓名은 성, 이름, 부칭의 3요소로 되어 있는 바, 부칭은 ~의 아들이라는 뜻이며, 우리의 항렬과 비슷한 개념임. 김경천의 자식들은 모두 이바노비치:남자, 이바노브나:여자의 부칭을 갖고 있음) 이바노비치가 주어졌다.

김 M. T.는 모스크바에서 그의 책 "1918년에서 1921년 사이의 소비에트정권을 위한 전쟁에서의 한국인 국제주의자들"이 발간되었다고 할머니에게 얘기했었다. 그 책은 실제 출간되었다. 김 M. T.는 김경천에게 바쳐지는 두 번째의 책을 발간하기를 희망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데, 아마 연령 때문인지 그렇지 않는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 책은 우리에게 보내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기억하시기를 전사 가운데 한명이 김경천의 말을 죽였을 때, 나의 할아버지는 매우 괴로워 하셨으며, 그는 진짜 사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었다고 한다. 말은 그에게 있어 진짜 친구였던 것이다.

어머니가 손님으로 가서 들었던 빨치산 노래는, 만일 나의 기억이 틀림없다면, 그녀의 가요집에 한국말로 기재되어져 있었다. 언젠가(1985년 이후 : 김 베라이바노브나는 1985년에 돌아가셨음) 나는 어머니에 대한 추념으로 가요집을 1994년 알마타에 있는 카자흐스탄 國立大學敎 신문학과를 졸업한 나의 조카딸 허이리나에게 선물하였다.

그리고 한가지 인생의 특징이 있다. 지난날 김경천은 블라디보르톡에 있는 사범대학에서 일본어와 군사학을 가르쳤다. 나는 잘 모르는 김경천의 여동생의 운명에 대해서는, 나는 오직 다음 사실만을 알고 있다. 1950년대 북한 어디에선가로부터 카라간다市의 우리에게로 편지가 날라 들었다. 그날 귀가하였을 때, 어머니는 무엇인가를 매우 걱정스러워하고 계셨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보내달라는 부탁이 담긴 편지가 왔다고 대답했다. 그 당시 몇 개의 소련세계는 자랑스러워할 만 했다. 할아버지 김경천의 여동생의 자식들은 대학교를 졸업하였고, 그녀는 죽었으며, 편지는 그녀의 남편이 썼다고 쓰여져 있었다. 어머니는 걱정스럽게 말씀을 계속하시길, 우리는 5자녀가 있고, 그러한 선물을 실제 할 만한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하셨으며, 김경천의 여동생이 부탁했으나 어머니가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씀하셨다. 일은 실제 이렇게 벌어졌으며 나는 어머니를 이해하고 있다. 한국에 있는 그들은 정말로 우리가 실제 어떻게 사는지를 몰랐을 것이다. 누가 1937년에 고통을 받은 민족의 고난에 잘못이 있는가? 문제는 어렵고, 단순하지 않으며, 해결하기 어렵고...... .

수십년이 흘러 세대가 바뀌었으나, 역사는 반드시 공정한 사람들의 의욕적인 智力에 의해 탐구되어야 하며, "그리고"라는 단어에 종지부를 짝어야 한다.

영원한 좋은 추억과 공손한 경례는 깊은 존경과 감사의 표시이다. 나의 사랑하는, 나의 가슴 속 깊은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친척들이여!







복권에 관하여(제목이 잘못달린 것 같음:역자주)

김경천의 막내딸(지희)의 얘기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김경천의 부모님들은 유정화가 16세가 되었을 때, 그녀의 부모님들의 동의를 얻어 그녀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김경천의 부모님들은 자기의 아들을 유정화에게 소개시키고,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르기 1주일 전에 혼인잔치가 벌어졌었다.

일본으로의 출발에 앞서 김경천은 피아노를 사고, 피아노선생을 구한 뒤, 젊은 아내에게 반드시 그에게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한다.

김경천은 자주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를 통해 유정화에게 끊임없이 현재의 감정을 나타내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는, 자기집 정원에(밤중에) 나가 그녀의 가장 깊고 그윽한......그 자에 대해 달과 얘기하곤 했다는 것이다.

김경천은 일본에서 6∼7년간 공부를 했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유정화를 일본으로 불렀고, 그들은 거기에서 살았다. 지희의 말에 따르면, 나의 어머니(김 베라 이바노브나)와 지혜(뉴라 아주머니)가 거기서 태어났다고 했다. 지희의 말에 따르면, 딸들의 모든 이름은 그들의 아버지 김경천이 지어주었다고 했다. 모든 이름에는 함축된 뜻이 있다. 이렇게 나의 할아버지 김경천과 나의 할머니 유정화의 운명이 이루어졌었다.









작가의 辯

많은 이러한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나는 김경천과 유정화에 관한 좋고도 영원한 추억을 자라나는 젊은 같은 핏줄의 세대인 근친들의 기억을 세상에 남기고 싶었다. 이 기억들은 헌신적인 조국에 대한 표상이다. 그들이 보여준 진짜 감사함을 느끼는 인간의 품성은 용감성, 영웅성, 서로간의 사랑은 물론, 자유로운 조국을 보고자 하는 높은 목표를 위하여 인생 자체에 대한 사랑이었다.

附言 :

나의 염원은...... . 우리 家系에 대한 나의 얘기를 계속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

깊은 존경과 함께

에브게니 김





























김경천 출생일로부터 110주년에 바친다.

나의 어머니 김 베리 이바노브나의 追想으로부터

러시아에로의 奭程

어머니의 아버지 김경천은 오래 전에 러시아에 있었다. 그의 아내, 나의 할머니 유정화는 자기 딸들과 함께 빨치산 通信線을 통해 은밀히, 어머니의 말씀처럼, 남편과 만나기 위해 그 먼 러시아로 어린 딸들과 함께 몰래 준비하였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어머니 유정화가 그녀가 이제 어른이 되었을 때 얘기해 준 것들이다. 먼길 채비가 끝나자, 그녀는 조금이나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세간집기, 물건들을 은밀하게 팔아 치워야 했다. 이러한 일들은 일본인들이 알아채리지 못하게 극도로 은밀하게 처리하여야만 했다. 그래서 밤에 빨치산의 通信線을 통하여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해서 러시아 국경까지 이동하여 갔다. 그리고 어머니가 이억하기로는, 그들이 밤중에 어느 마을엔가 도착했을 때, 일본인들의 "가택수색이 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딸들을 방바닥 밑 찬 한국 난로(구들)에 숨겼으며, 다행히 어떠한 이유와 상황에서인지는 몰라도, 일본인들이 그 집은 비켜 갔었다. 나의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며, 러시아 국경까지 다다르는 데에는 큰 강을 건너야 했고, 바라는 강가에 도달하려면 바람의 방향이 그들을 도와주어야만 했다.

그래서, 어느 밤중에 수행한 고기잡는 한국인 노인 2명과 함께 할머니와 딸들이 강에 도달하여, 고기보관하는 고기잡이배의 선창에 몸을 숨겨야 했다. 노인들이 강변으로부터 노로 배를 떠밀어 냈을 때, 험한 강변 언덕에서 일본말로 "누구냐? 서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총을 쏘고...... . 이른바 "순풍"이었다. 큰강에서의 바람은 정말 순풍이었고 고기잡이배는 러시아 국경에 도착하였으며, 어머니가 기억하시는 바에 의하면, 애들이 선창에서 밖으로 몸을 내밀지(드러내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한국인 노인들은 할머니께 "절대로 선창에서 몸을 내밀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눈 큰 사람들이 당신들을 잡아 갑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처럼, 러시아인을 뜻하는 것이다.

고기잡이배는 할머니 유정화가 사전에 빨치산 통신선을 통하여 갖추어 놓았던 필요증명서를 제출하였던 상변 국경에 도착하였다. 이렇게하여 용감한 여인 유정화는 러시아말 한마디도 모르면서 어린 딸들과 함께 러시아에 있게 된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유정화의 맏딸이다. 유정화는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1992. 2. 15

카라간다市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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