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2010.08.31 14:26

권업회-4.재러한인의 계몽과 민족의식의 고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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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업회의 목적과 이념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베리아 한인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경제문제와 항일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정치문제를 결부시키는 전술을 취하면서 끝내는 조국독립을 달성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권업신문 역시 이러한 목적과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재러한인의 계몽, 민족의식의 고취, 그리고 국내에서의 항일운동 등에 대한 기사들을 많이 싣고 있다.

우선 재러한인을 계몽하는 기사이다. 이에 대하여는 상당히 많은 기사가 다양하게 실리고 있다. 우선 1912년 5월 26일 논설 <셷년동포의제 바라鏅바>에서 국가가 강성하려면 사람마다 수양에 힘써 품성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우리나라가 삼국시韡에 데일 강셩치 안이폁얏던가. 그런韡 그런시韡에는 팔관(八關)의 계와 풍월(風月)의 도가 잇어 사鿑마다 수양에 힘녡서 국민의 품셩이 뎨일 놉던 시韡엿던이라

라고 하고 있고, 1912년 7월 28일자 논설<동포사이의 사랑>에서는,

세게 각국민족이 각기 스꿁로 단결폁며 노력과 완력으로 셩쿡존망을 닷툼은 우리의 당폅시韡이오 망망폅 대양가운韡에 조각꟡를 타고 풍랑을 맛나 좌우를 또라보아도 구폁여 주리업습은 우리의 쳐폅 경우니 이시韡 이 경우에 잇어셔 참마럑 참뜻으로 내동포를 사랑폁여 나는 너를 보호폁며 너는 나를 구원폁여 쓰고 닮을 갓치폁며 꾓고 어려움을 함께폁지 않으면 졈졈 우리신셰만 참혹폁게 될지니라

라고 하여 참마음, 참사랑으로 동포들끼리 서로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권업신문에서 동포사이의 사랑을 강조한 것은 당시 재러한인 사회가 출신지역별, 단체별 등의 파벌로 갈등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1912년 9월 22일자 논설에서는 <공과꿁를 잘 분간폁여야 평일>을 통하여 공과 사의 구분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윤해는 1913년 3월 16일자 기서 <공론과 샤회>를 통하여,

샤회라 것은 다수폅 사鿑이 서로 관계를 력락폁야 사鏅 것을 일홈폑이니 다수폅 사鿑으로써 꿷존을 유지코져 폑에鏅 반듯이 공론이 아니면 하로라도 련락꿷존의 목镢을 달평슈 업鏅고로 공론이 업鏅 샤회鏅 곳 멸망평것뿐이니라

라고 하여 사회에 있어서 공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어서,

만약 공론이 업스면 교육을 힘써 몃쳔명의 학꿷을 양셩평 지라도 효력이 업슬것이오 몃꟢만의 믁본으로 실업을 힘쓸지라도 샤회에鏅 만분리익이 업슬것이오. 몃쳔명 몃만명의 회원으로 단톄를 ꏥ든 다폁여도 빈일홈뿐이오 샤회의 통일은 도뎌히 바라지도 못평지라 그럼으로 이제 폡외에 나온 여러 형뎨에게 졍셩을 다폁야 비노니 공번된 일에 삼가 꿁졍을 용랍지 말고 힘써 민족젼톄의 리익을 걬혀 공론을 널리 쏡용폁매 민족의 리익을 韡표폁야 공론을 발표폁鏅쟈가 잇거던 그 압에 무릅을 꿀고 꽅복폁라 그리폁여야 우리샤회가 멸망치 안코 겨오 꿷존을 유지평지며 우리의 바라鏅 뜻을 셩취평날이 잇으리라

라고 하였다. 즉, 민족전체의 이익을 살펴 공론을 채용하며, 민족의 이익을 대표하여 공론을 대표하는 자가 있거든 당파에 구애되지 말고 이에 순종해야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주목되는 것은 한인 지도자들의 당파 극복을 위한 노력이다. 1913년 9월 초순 권업회의 서울파, 평양파, 북한파의 중심인물들이 블라지보스또크 시내 강양오의 집에 모여 상호분립의 잘못을 밝히고 장래 공동 일치의 행동을 할 것을 맹세하기도 하였다.

) 김정주, セ조선통치사료ソ 7, 한국사료연구소, 1971, p. 616 그리고 다시 한달여가 지나서 북간도 지역에서 블라지보스또크로 온 李東輝는 동년 10월 12일 권업회관에서 개최된 자신에 대한 환영회 석상에서 해외 동포의 의무와 관련하여,

여러분은 꿷각폁시오. 남우면 망폁고 합폁면 흥폁鏁니 鏡가 이와试치 말폑은 말을 꾸미鏅 것이 안이라. 우리가 오鏉날 엇던 디위에 잇소. 좀 꿷각폁야 보시오. 만경창파에 풍도가 위험폅데 초월이 샹시평지라도 试치탄 ꟡안에셔 셔로돕고 셔로 구졔폁지 안이폁겟鏅가(만쟝이 박쟝) 三三五五의 양의 무리가 갈鯡에 호랑의 날칼온 톱을 만나면 셔로 합폁야 나 갈 것이 맛당폁지 안인가. 과연 단합평지어다. 남우면 뎨二차 멸망을 받을지니 과연 오鏉날은 살부살형의 원수라도 우리의 광복을 희망폁야 셔로 난우지 마라

) 권업신문 1913년 9월 20일자 <리셩믡의 연설>

라고 하여 파벌을 극복하고 단합하지 않으면 제2차 멸망을 받을 것이니 오늘날 살부살형의 원수라도 우리의 조국 광복을 위하여 단합할 것을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심으로 복종할 것을 주장하였다.

우리가 셔로 셩심으로 복죵폁옵셰다. 긔왕에鏅 그럿치 못폁얏소. 여러 셷년들과 션진 사이에 셔로 밋고 죤뭗폁鏅것이 부죡폁야 낭쿡가 된일이 만소. 오鏉 이후에도 셔로 밋고 셔로 위로 안이폁면 우리가 일폁鏅 것도 다 쓸韡업소. 우리가 셔로 붉은 졍셩으로 폁지 안으면 황금탑을 끵고 독립젼믷을 평지라도 다 쓸韡업鏅것이오. 만쟝져군이여 셔로 밋고 복죵폁옵셰다.

) 위와 같음

라고 하여 서로 믿고 존중할 것을 주장하고, 그렇지 않으면 황금탑을 쌓고 독립전쟁을 할지라도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동휘에 이어서 柳東說, 오주혁, 홍범도 등도 역시 블라지보스또크에 와서 이를 주장한다.

) 김정주, 앞의 책, p. 617

또한 남의 父兄된 자로서 갖고 있는 악습의 폐단을 제거할 것도 주장하였다. 1912년 9월 15일 논설 <남의 부형된쟈의 꿷각을 평일>에,

첫믡는 그 가뎡간에셔 흉악폑욕과 무도폅말을 함부루鏡여 주먹과 몽치가 폗용의 형구가 되며 망폅놈과 빌어먹을 년이 례꿁의 어투가 되야 무례폁고 불공폅 것으로 그 습관을 삼으니 그 믁뎨가 어韡셔 본을 받아 조수폁鏅 사鿑이 되며 둘믡는 그 일평꿷 쳐신폁鏅데 죠곰도 조심이 업서 야휘치고 야바위노鏅 것을 쟝부의 본꿢으로 알며 묡정폁고 약담꟡ 먹鏅 것을 영웅의 능꿁로 알며 무리폅 풍파와 무리폅 시비를 다반의 일로 알고폁니 그 자뎨가 어韡서 본을 받아 졍결폅 사鿑이 되며

라고 있듯이, 남의 부형된 자의 악폐를 지적하고, 이어서 놀며 먹는 것을 버릇으로 하고 있는 점, 남을 욕하고 비판하기를 좋아하며, 요행으로 살 생각을 하는 점, 남을 매번 업신여기는 점, 지식을 배움에 있어서 거만한 점 등의 악폐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1914년 6월 21일 논설 <악폅습관을 바리라>에,

꽬흐다 우리부여민죡은 오鏉날 광대폅 텬디에 설곳안즐자리업시 다만 밋을 것은 우리의 품셩이라. 어韡가던지 착한사鿑의 일폑으로 남의게 밋음을 얻어 모든 직님에 발을 붓칠지니 만일 악폅 버릇을 고치지 안코鏅 아모것도 될 수 업고 우리鏅 다시 설곳도 업슬리니 이에 크게 경계폁고 다만 우리의 직힐 습관은 四천년鿡에 슝상폁던 륜리도덕이며 우리 조국의 말과 글을 향샹 습관으로 잇지 말고 또 유리의 동포를 사랑폁鏅 마럑과 조국을 광복평 일은 날마다 버릇폁야 쉬지 말지니라

라고 있듯이, 악습을 버리고 조국의 말과 글을 항상 습관으로 잊지 말고 또 우리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과 조국을 광복할 일을 날마다 버릇으로 하여 쉬지 말자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12년 10월 27일자 논설 <외국말꟡우鏅이에게 고폑>에서는 당시 러시아 지역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러시아어를 배우고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 있는 점과 관련하여,

초년붓허 국민镢교육을 못받아셔 내나라가 무엇인지 몰랏鏁니 그 혀가 변폁鏅날에 그 눈도 변폁며 그 귀도 변폁며 그 마럑迁지 변폁야 이에 니름이니 어린아폡들은 아무쪼록 내나라말 내나라글 내나라력꿁를 잘꟡우며 나이 만폅이라도 불가불 가나다라 수십줄은 닉히며 본국력꿁 디지 두쏢은 읽은 후에야 다른 말을 ꟡우던지 말던지 할 것이니라.

그러치만은 이에 엇지폁리오 고국을 도라보니 쇼학교아폡들의 일어꟡우鏅 소리뿐이오 외양을 나오니 한인의 학교鏅 쇼학교도 몃诡가 못되니 희라 무엇을 바라리오 바랄것은 외국말 아鏅이가 스꿁로 迡닷鏅것 뿐이로다 지셩으로 비노라 외국말 아鏅이가 스꿁로 迡달음이여

라고 하여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국민적 교육을 받지 못하고 외국어를 배울 경우의 병폐를 지적하고 나의 많이 먹은 자라도 한국역사책 두권 정도는 읽은 후에 외국어를 배울 것을 주장하였다. 당시는 곤다찌 총독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귀화가 추진되는 등 러시아화정책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그리고 나라를 잃고 러시아로 나온 청년들에게 1912년 11월 3일자 논설 <외디에 나온셷년>이라는 글에서,

오날의 곤궁이 우리 일반셷년에게 주鏅 약이니 더욱 분발폁매 더욱 연구폁야 공부평슈 업鏅 따에셔 공부폁도록폁매 꿁업평슈업鏅 따에셔 꿁업폁도록폁고 일시 곤란에 놀鏡여 퇴썂폁鏅 꿷각을 가지지 말지어다

라고 하여 일시 외국에서의 곤궁에 굴하지 말고 더욱 분발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지역에 와서 노동하는 동포들에게도 1913년 8월 3일자 논설 <로동폁鏅 동포에게 고폁노라>을 통하여,

로동폁鏅 여러동포들이여 무꿑 목镢으로 수만리 타국에 와셔 오鏉 고로韡 鿡일 농평으로 왓다갓다 뎡쳐업시단이면서 신산폅 공긔에 몸과 마럑이 한가지로 괴로운 것을 엇지 참아 견韡鏅지 우리鏅 붓을 들기젼에 비쏑폅 눈물을 금치못폁노라(중략) 물론 엇더폅 쌡지와 목镢을 가륵던지 이왕폡외에 나와 몸을 로동계에 드려노은 이샹은 돈을 버러가지고 공익사회의 일을 도와주거나 어鏁학교에 입학폁야 공부를 폁거나 무엇으로던지 제민족에게 유익폅 사업을 폁鏅것이 오鏉날 한국사鿑된쟈의 쏢임이 아닌가 이제 간단폅 말로 여러분에게 드리고져폑은 곳 폗심과 부즈런폑과 검박폑이라 っ

라고 하여 항상 일정한 마음 자세와 부지런함과 검소함을 강조하였다. 당시 한인들 가운데에는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가장 많았으며, 노동자들 가운데에는 광업 특히 사금광업, 어업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다수였다.

) 고승제, ゛연해주이민사연구(1853년-1945년)ゝ, セ국사관논총ソ11, 1990, pp. 10-11 특히 노동자들 가운데에는 아편을 먹는 이들이 종종 있었으므로 1913년 3월 2일자 논설 <아편 먹鏅이를 경계폁노라>를 통하여 이를 금할 것을 촉구하였다.

아울러 해외에 나온 동포들에게 1914년 3월 15일 논설 <고향꿷각을>을 통하여 열심히 살 것과 1914년 2월 15일 논설 <졍성과 밋음으로>를 통하여 일제에 총칼을 겨누기 전에 모든 일을 정성과 믿음으로 행할 것 또한 강조하였다. 또한 1912년 10월 20일 논설 <일년벌어 하로에 업시폁여>를 통하여, 그리고 1914년 2월 28일 논설 <져썂이 필요폁도다>를 통하여 저축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 밖에도 논설을 통하여 동포들을 계몽하고자 하였다. 1912년 6월 16일자에서는 논설 <한가지식평일>, 1912년 8월25일에는 논설 <치밀폅꿷각=영원폅 꿷각>, 1914년 3월 22일 논설 <공공폅 마럑과 협동의 힘으로>, 1914년 3월 29일자 논설<일들을 폁옵시다 鯡가돌아왓소>, 1914년 5월 9일 논설 <셩공폁랴면 한가지로만>(愚我)등을 통하여 동포들을 계몽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권업신문은 재러동포의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한국과 관련되는 각종 기념일을 이용하였다. 먼저 주목되는 날은 일제에 의하여 조선의 주권이 짓밟힌 8월 29일 국치일이다. 권업신문에서는 1912년 8월 29일 국치일을 맞이하여 기념호를 내고 주필인 신채호는 <이날>이라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이글에서 그는,

단국诡국 사쳔이꟢ 사십오년 팔월이십구일 이날은 엇더폅 날이오 사쳔년 력꿁가 끈어진 날이오 삼쳔리 강토가 업서진 날이오 이쳔만 동포가 노예된 날이오 오꟢년종사가 멸망폅 날이오 셰계만국에 결코 졀교된 날이오 텬디 일월이 무관폅 날이오 산쳔초목이 꽬허폅 날이오 금슈어별이 눈물 흘린 날이오 츙신렬꿁의 피흘린 날이오 럡국지꿁가 통곡폅 날이오 우리의 신셩폅 민족이 망폅 날이오 우리의 꿷명이 끈어진 날이오 우리의 믡산을 일흔 날이오 우리의 믁유를 ꯡ앗긴 날이오 우리의 신테가 죽은 날이오 우리鏅 입이 잇어도 말못평 날이오 귀가 잇어도 듯지못평 날이오 우리의 조샹은 따속에셔도 눔을 감지 못평 날이오 우리가 이 셰샹에 살아도 희망업鏅 날이오 우리鏅 살고저폁야도 살곳이 업鏅 날이오 우리가 죽고쟈폅들 무들 따이 업鏅 날이오 꽬흐다 우리사랑폁鏅 동포여 이날이날을 기억평 날이오

라고 하여 동포들에게 일본에 치욕을 당한 이날을 기억할 것을 강조하고 이어서,

지금 삼년젼 이날에 원슈의 님군 목인이가 꿁鏡졍의鿉 우리대한에 쿡송폁야 수만명 왜병을 방방곡곡에 ꟡치폁고 ꏡ국적 리완용 송병쥰 등을 롱락폁야 합병됴약을 톄결폅 날이오 이날이날은 뎌죠그마폅 셤뭗에 잇던 하이적으로 벌것 뻣고 금슈와 갓치 폷동폁던 뎌야만과 원슈되던 날이오 이민족 뎌민족이 합폁야 명꿢이 국가로 수쳔년도 못된 뎌무도폅 왜국에 우리 꿁쳔년된 민족이 멸망받은 날이오

라고 하여 조그마한 섬중에서 벌거벗고 금수와 같이 행동하던 야만족과 원수된 날이라고 하여 일본을 실랄히 비판하고 있다. 아울러 신채호는 일제의 조선 강점으로 일본 자신도 점점 쇠망하게 된다고 보고 있다. 즉,

원슈의 나라는 졈졈 쇠망폅 형편에 빠지鏅 것도 이날이오. 마귀를 슝꟡폁며 도덕을 무시폁고 밤낫 사鿑죽이鏅 믡조만 가라치鏅일도 이날이오 외국국채가 수십억이 되야 보샹평 방침이 업슴으로 국가의 쥩오와 항구를 젼당 잡힌일도 이날이오

부녀를 외국에 쿡송폁야 ꏡ음으로 꿷활코져폁鏅일도 이날이오 뎌의 귀족들은 음란샤치가 극도에 달폁야 평민은 살슈가 업슴으로 샤회주의쟈가 꿷긴일도 이날이오 뎌의 님군 목인이하 황족을 폭팔약으로 몸살케폁고 공화국을 셜립코져폁랴던 폷덕 등 수십명이 죽은일도 이날이오 뎌의 졍치의 부쿡와 인민의 불평은 날로 심폅일도 이날이라

라고 있듯이, 일제의 조선강점일은 바로 일본 평민도 살 수가 없어 그 가운데 사회주의자들이 생긴 날이며, 일본의 정치적 부패와 인민의 불평이 날로 심하게된 계기가 된 날도 이날이라고 보고 있다. 신채호는 바로 이날에 해외 동포들이 가져야 할 마음 자세에 대하여,

우리한반도를 사랑폁鏅 동포들아 우리가 신셩폅 민족이 아닌가 우리의 마럑을 다폁고 힘을 다폁고 몸을 밧쳐 우리가 자나 迡나 사나 죽더鿡도 이날을 잇지말고 우리가 이날이 우리가 긔렴평날 되기迁지 힘쓸지아다. 이날에 이말로 우리대한뎨국이쳔만 동포형뎨자ꏡ에게 고폁며 특별히 아셷영디에 잇鏅 우리사랑폁鏅 동포여 이날에 이 꿷각으로 모셔(摩西)션지의 본을 밧을 지어다. 이스라엘 민족 사십만을 럡급에 나라고 가남복지로 가던 이날이 되며 항우가 강동믁뎨팔현으로 도강폁던 이날이 그날이 될가 그날이 이날이 될가 이날 이날

라고 하여 이날은 사천년 역사가 끊어진 우리 이천만 동포가 노예된 날임을 지적하고 자나깨나 이날을 잊지말고 우리가 이날을 해방의 기념일로 바꿀때까지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권업신문에서는 1913년 국치일을 맞이하여서도 특별호를 간행하여

) 권업신문 1913년 8월 29일자 전면 모두에 국치일에 관한 기사를 싣고 있다. 특히 논설 <국치무망일>을 1면 전체에 걸쳐 서술하고 있으며 2면에는 이상설이 <창폡자>라는 이름으로 <이날을>이라는 글을 싣고 있다. 그 밖에 <국치를 당폅 후의 鏡디의 참샹> 등의 글이 실려 있다.

1912년 9월 9일자에서는 고종의 만수절를 하례하는 글인 <쯡황뎨만슈졀>을 게재하고 있다. 이글에,

단군사천이백사십오년 구월 팔일 이鏉은 곳 쯡황뎨 육십일회 만슈졀이라 망국뎨삼년 꽬흐고 압혼 긔렴폅후 십일이오 일본황뎨 목인의 죽은 쇼식 드른후 사십일일이라 희라 우리대한사鿑된쟈鏅 이날을 당폁야 엇더케 회포를 지음이 가폅가(중략)

더욱 긔괴히 압흔 일은 쯡황뎨가 원鿡 일본황뎨와 동갑의 님굼으로 오날에 꿷꿁유명의 길이 달넛鏅韡 뎌 죽은 일본황뎨는 일본 젼국이 럡통의 졍을 금치 못폁며 셰게각국이 됴상의 례를 표폁야 일본의 영화롭고 명예로운 력꿁를 그 죽은 몸에 휘감고 황쳔으로 향폅鏅韡 이에 덕슈궁을 우러러 보건韡 인간이 다 반가워폁는 회갑날을 당폁야 醕날의 ꟢관죠회와 인민경썂은 고샤물론폁고 곳 가족간의 졍경을 말폁더鿡도 륭희뎨는 궁뭗의 구슈가 되며 황쯡믁는 탁구의 볼모가 되고 좌에 시립폅이는 오직 머리센 궁녀 몃诡뿐이니 이것이 엇지 우리의 비통평꟡ 안인가

라고 있듯이, 고종이 회갑일에 백관조회와 백성들의 경축을 받지 못함을 비통해하고 있는 것이다.

단군의 성탄절을 맞이 하여서는 1912년 11월 10일 논설<단군대황조셩탄졀>이라는 글을 1면과 2면 전체에 걸쳐 특집으로 게재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단군의 후손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사鿑이 궁폁면 근본으로 도라온다고 오鏉부터鏅 니즌 단군을 다시 꿷각평만폁니 라. 고통이 이갓폁고 곤남이 이갓폁니 니즌 단군을 다시 꿷각평만폁니라. 꿷각폁고 또 꿷각폁야 우리가 다 단군의 믁손인지를 알면 동포꿡이에 간졀히 사랑폁鏅 마음이 나리라 우리가 다 단군의 유민인지를 알면 나라일에 韡폁야 분발평 졍신이 꿷기리라 단군의 창조폁신 문명이 엇더폅지를 알면 우리가 꿁쳔년鿡 신셩폅 민족으로 엇디오鿡 남에게 굴복폁리오폁鏅 의기가 발폁리라 단군의 셩취폁신 무공이 엇더폅지를 알면 우리가 넷적부터 무강폁던 죵믁로셔 엇지 기리 퇴보폁리오폁야 젼진평 용ꏷ이 발폁리라 외국에 류폁鏅쟈鏅 더욱 단군을 꿷각폁라 그리폁면 고국을 닛지 안으리라 궁폅길에 빠진쟈도 단군을 꿷각하여라 그리폁면 희망의 빗을 차지리라 오너라 동포들아 오시오 동포들아 오날부터鏅 니즌 단군을 다시 꿷각평만폁니라 졍셩으로 형식을 韡신폁며 공경으로 희꿷을 韡신폁야 대황조辁 들이고 셩탄절 이날부터 꿡사鿑이 될지어다.

단국대황조 셩탄졀에 우리가 동포에게 고폁鏅 바가 이며 바라鏅 바가 이로다.

라고 있듯이, 단군을 생각하면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으며,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아울러 권업회에서는 11월 11일 권업회 종람소에서 단군성탄일 경축회를 개최하고자 발기하였다.

) 권업신문 1912년 11월 10일자 잡보 그리고 11월 11일에 수백명이 모인 가운데 이상설, 황공도, 조장원 등의 주도로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 권업신문 1912녀 11월 17일자 잡보 또한 평양 숭령전에 봉안되어 있는 단군의 어진을 촬영하여 단군대황조의 사진을 판매하기도 하였다.

) 1912년 12월 29일자 광고 <단군대황조어진발폷>

그리고 음력설을 맞이하여 1913년 5월 26일자 논설 <음력명졀과 한인>에서는,

단오 츄석 등은 고샤폁고 곳 설도 양력으로 쇠어 평슈잇鏅韡로 구습을 诡량폁쟈고 폁던 것은 갑진을꿁년간 鏡디각지 꿁의 쟝도폁던바오 왼셰계가 다 양력 명졀을 명졀로 쇠더鿡도 우리鏅 다 좃지말고 우리鏅 음력명졀을 명졀로 폁야 고鿡습쇽을 힘써 보젼폁쟈폁鏅것은 경슐이후 醕것을 닛지안鏅이의 꿷각이라

라고 하여 음력 명절을 명절로 하여 한국 고래의 습속을 힘써 보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역시 추석을 맞이해서도 1913년 9월 1일자 논설 <국쇽명졀로 가꟡졀을 당폁야 소회를 륢노라>를 통하여 이를 지킬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1914년 7월 19일 논설 <리쥰공의 피흘닌날>이라는 기사를 통하여 이준이 죽은 지 8년째 되는 날을 기념하고 있다.

권업신문에서는 국문을 강조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1913년 6월 2일자 논설 <사鿑마다 국문은 알어야지>를 통하여 국문 사용의 필요성을 강조하는한편 1914년 5월 31일자 논설 <하긔방학에 국어강습>에서는,

오늘날 한국우리동포들이여 우리형편이 엇더케 되얏鏅뇨 鏡디로 말하면 금슈강산에 사모찬것은 원슈의 독폅 긔운으로 우리민죡의 꿡멸을 믡촉폁야 반만년 오鿥국어鏅 입으로 번지게 못폁고 저셤에 추폅죵믁의 언어로 원숭의 흉鏡처럼 우리일반샤회네 다 일어쓰게폁며 외디로 보면 꿷활의 관계로 그 나라 어학을 아니꟡올수 업스나 심지 鏡나라말은 이저바린이가 죵죵잇으니 엇지 럡셕폅일이 안이리오. 제나라말을 잘모르고鏅 제나라꿷각이 날수업스며 그 민죡의 한분믁鿉 덜게됨이니라

이졔 하긔방학의 긔회를 당폁야 우리鏅 아령각디방 루시아학교에 공부폁鏅 셷년믁녀의 부형되시鏁의게 간졀히 츙고폑은 이 슈 샴샥방학동안에 그믁녀로 폁야곰 우리나라 국어鿉 연습식히는 것이 급폅 일이니 (중략)

꽬흐다 한국동포들이여 오鏉날 폡외에셔 일시 꿷활폁鏅 것도 다 늙은 부형의 럡쓴덕이오 아직은 룬은 셷년의 힘으로 우리 일반동포의 꿷활계에 크다큼폅 리익을 기친일이 업鏁니 과연믁녀鿉 사랑폁鏅 부형이거든 먼저 鏡나라 국어鿉 ꟡와줄지며 조국을 사랑폁鏅 셷년이거든 급히 네나라 국어鿉 ꟡홀지니 우리가 뭗등이샹 학문을 ꟡호믁면 슈삼국어학을 연습폁야만 되거든 엇지 제나라말을 잘알지 못폁고야 국민의 본분이라폁리오. 이밧게도 남의 고용인 평지라도 제나라말을 자셔히 모르면 그 영향이 적지 아니폁니 럁鏅 다 좀좀 폅일이거니와 우리鏁 력꿁잇는 ꟢셩이라 저넷적 로마나라의 가졍교육과 오鏉 유대사鿑의 질긴 텬셩을 모범폁야 어韡가던지 한국사鿑은 제나라졍신으로 보젼폁랴면 이 하긔방학에 우리나라 말과 글을 연습폁鏅 것이 뎨일 긴요폑으로 간졀히 츙고폁노라

라고 하여 러시아 각지역 러시아 학교에서 공부하는 청년 자제들에게 한국 사람이 제나라 정신을 보존하려면 우리글과 말을 연습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여름 방학만이라도 자제들에게 국어강습을 시킬 것을 호소하였다.

권업신문사에서는 안중근의 하얼빈에서의 의거를 활동사진을 통하여 재러동포들에게 상영하였으며,

) 권업신문 1912년 8월 29일자 특별잡보 <럡국렬꿁의 활동사진> 1914년 6월 28일부터 <만고의꿁 안뭗근젼 檀仙 >을 8월 23일 까지 9회에 걸쳐 연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12년 10월 6일 1면에 별보로 최병숙이 작성한 <고이준공전기간행, 유족구휼의연금모집회취지서>를, 1912년 12월 8일자 잡보에서는 <고구려광诡토대왕비문>의 원문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또한 창간호부터 1912년 10월 27일까지 중국혁명약사를 연재하여 이웃나라 중국의 혁명사를 통하여 한국인의 혁명의식을 양양시키고자 하였다.

3) 항일관계 기사

본국 소식과 관련하여 국내에서의 항일운동 기사도 많이 수록하였다. 특히 105인 사건, 의병, 그 밖에 국내에서 전개된 항일운동기사들이 실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지면을 통하여 자주 게재된 것은 105인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권업신문에서는 창간호부터 105인 사건에 대하여 기사를 싣기 시작해서 1913년 말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보도하고 있다. 1912년 10월 15일자 논설 <럡국당공판꿁건의 판결션고가 이와갓치되얏도다>에서는,

럡국당공판젼말은 본보에 썂호게믡폁鏅뭗 이어니와 이제鏡디 쇼식을 졉폅즉 양력 구월 이십팔에 경셩디방법원에셔 판결션고가 되얏鏅韡 이와갓치 잔인 참혹 불법 무도폁게 되엿더라

라고 하여 그 판결에 대하여 일본을 실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럡국당공판쇽보>라고 하여 공판의 전말을 지속적으로 보도하였다. 특히 1912년 6월 30일자에는 1면 전체에 게재하였으며, 9월 15일자에서는 2면 전면과 3면 반면에 걸쳐 각각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1912년 8월 18일자 논설 <일인의 간사폅 슈단>에서는 105인 사건 관련자들에게 고문을 가한 것을 비판 하고 있다. 즉,

꽬흐다 오鏉날 우리나라 사鿑은 눈이 잇어도 볼슈업으며 귀가 잇어도 드를슈업으며 입이 잇어도 말평 슈 업鏅 사鿑들이라 그럼으로 뎌 일인들이 저의 마럑韡로 이런 악폅일을 폁鏁니 동포들이여 꿷각평지어다 언제나 우리도 남과 갓폅 감옥졔도를 마련폁고 죄슈를 문명폅 졔도로 韡우폁며 피고를 문명폅 졔도로 신문폁면셔 꿷활폁여볼가. 그러나 이고문문뎨 갓폅것은 오히려 륢은 문뎨라 뎌일인이 우리나라 십삼도로 폅너른 감옥을 ꏥ드럿으며 그안에 잇鏅 우리동포는 다 일인밋헤 죄슈오 우리나라에셔 쓰鏅 일인의 법률 졍치鏅 다 우리에 韡폅 감옥규칙이며 우리나라에 시셜폅 일인의 포韡 병영은 다 우리에 韡폅 큰 형구니 언제나 우리가 이 디옥을 깨쳐 광면폅 텬당을 ꏥ들고 텬당꿷활을 폁여 볼넌지

라고 있듯이, 고문을 비판하는 한편 일본인이 한국13도를 넓은 감옥으로 만들었으며, 그안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는 다 일본인의 죄수며, 우리나라에서 쓰는 일인의 법률, 정치는 다 우리에 대한 감옥 규칙이며, 우리나라에 시설한 일본인의 군사시설은 다 우리에 대한 큰 형구라고 비유하였다.

한편 의병기사도 다수 수록하고 있다. 1912년 9월 22일자 본국통신에서는 <의병쟝이 또한아가 졌어지도다>라고 하여 황해도 의병장 이진룡의 체포기사를 실고 있다. 또한 1913년 1월 5일자 잡보에서는 <의병쟝이진룡씨쇼식>을, 그리고 1913년 6월 23일자 본국통신에서는 <강원도의대거동>이란 제목하에 큰 활자로 ぢ모쳐로 오鏅 쇼식을 들은즉 요사이에 강원도 방면에鏅 의병수쳔명이동폁얏음으로 북한 디방에 잇鏅 일병들이 모다 강원도 디방으로 모힌다더라っ 라고 보도하고 있다. 또 1913년 7월 7일자 별보에서는 <곡산의 의병>, <문쳔회복>, <원산의 공허>, <강원도의 의병>등을, <본국통신>에서는 <독립당의 견욕>을 게재하고 있다.

1913년 8월 11일자 본국통신 <의병쟝이 잡혓도다>에서는 황해도 의병장 김재화에 대하여, 1913년 10월 26일자 본국통신에서는 <의병중대장한졍만씨>, <우수은꿁형선고>등을, 1913년 11월 23일 본국통신에서는 <의병장김학홍씨피삢>을, 12월 7일자에서는 <의병쟝한졍만씨공소>를, 1914년 5월 31일자에서는 <김졍안쟝군의 대활동> 등을 게재하고 있다.

아울러 대한독립의군부기사도 다수 싣고 있다. 1913년 6월 2일 본국통신에서 대한독립의군부 의병장 곽한이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었음을 보도하였으며, 1913년 8월 3일자 본국통신에서는 <독립당을 꿁긔쌡믡로 모라>를 게재하였다.

그 밖에 1913년 3월 30일자 별보 1면에 큰 활자로 <국권회복의 대운동>이라는 제목아래에 16일 오후 6시경에 한국 경성 덕수궁 앞에서 조선 사람 44명이 모여 국권회복의 대연설을 하여 관광자가 500여명에 달하여 크게 불온한 상태가 있었는데 두령 수명은 곧 경무총감부로 잡아갔다라는 기사를 대서 특필하였다. 1913년 3월 30일자 본국통신에서도 큰 활자로 <독립젼믷의 총소리>라는 제목하에 이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내용을 1913년 4월 13일자 본국통신 <국권회복운동꿁건에 韡폅 쇽보>에서 그리고 1913년 5월 26일 본국통신 <리죵두씨의 공판긔>에서 각각 전하고 있다.

그리고 1913년 7월 7일자 논설 <鏡디의병쇼식에 韡폁야>에서,

대한문압헤 국권회복이 연셜이며 온양등디의 독립의군부의 조직이며 곡산읍의 의병과 일병의 졉젼이며 문쳔군의 일병 六十여명의 꿁샹등 쇼식이 근일에 니어 우리의 귀에 들어오鏅도다. 한주먹의 즌흙으로 아적죠슈갓치 몰녀오鏅 일본의 셰력을 막으리라鏅 단언평슈업지만은 여하간 대한사鿑의 마럑이 죽지안폑은 증명평슈잇도다.오호라 마럑만 죽지말어라 ꟢가지가 죽고 쳔가지가 죽엇을 지라도 마럑만 죽지안으면 대한이 대한사鿑의 대한될 그날이 잇으리라 (중략) 그럼으로 오鏉의 의병을 적다고 웃지밀며 쿡폁리라고 걱졍말어라 우리의 오鏉일은 일본꟡셢폁鏅 것 한아뿐이며 일본꟡셢으로鏅 또 의병한아뿐이라

라고 하여 오늘의 의병이 적다고 웃지말며 패하리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우리가 오늘 할 일은 일본을 배척하는 일뿐이며, 일본군 배척에 있어서는 의병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권업신문에서는 일본의 학정도 비판하였다. 1912년 8월 11일자 논설에서는 하얼빈 원동보 동년 7월 30일자에 실린 <셔양선바가 공포폅 한국鏡디에 일인의 학졍>을 전재하였다. 여기에서는 지방순사와 헌병이 공동으로 한인을 압제하는 일, 심판할 때에 각종 지독한 형벌을 가하는 일, 한인의 출판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박탈한 일 등 13가지 조목을 들어 일본의 학정을 비판하였다.

또한 1913년 11월 16일 본국통신 <강졔로 경썂을 식혀>에서는,

지난韉 三十一일 일황가인의 꿷일에 경썂폁라고 일총독부鏅 경향각쳐에 미리 명령폁야 유림게와 일반남녀의게 위협륢으로 지휘폁야 잔쏡鏅 뎌희가 준비폁야 놋코 일반한인을 셷폁야 슐과 음식을 멕인 후 가인의 만셰鿉 부르게 폁얏鏅데 이것을 항거폁다가 경찰셔에 二三일식 구류당폅 한인이 륢지안타더라

라고 하여 일제의 강압성을 비판하였다.

그 밖에 러시아정교에 관한 기사도 종종 보이고 있다. 권업회는 종교부를 두고 있었으며, 황공도, 오와실리등이 종교부장으로 하고 있었다.

아울러 권업신문에는 만주 지역에 대한 기사도 많이 실리고 있다. 1912년 11월 17일에는 <뭗령의 동포에게 고폁노라>라는 논설까지 실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간도지역의 자치단체이며 독립운동단체인 懇民會의 기사가 많이 실리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1913년 3월 2일자 <간됴쇼식 샹보>, 1913년 5월 26일자 잡보 <간민회의 셩황>, 1913년 6월 16일자 잡보 <북간도의 대운동회>, 6월 23일 간도통신이라는 제목하에 <간민회총회관건썂>, 1913년 9월 21일자 잡보 <간민회방폡로 농민계조직>, 1914년 1월 25일자 잡보 <북간도쇼란별보>, 1914년 2월 1일 논설 <북간도쇼란경과에 韡폁야>, 잡보 <북간도쇼란샹보>, 1914년 2월 29일 잡보 <간만회뭗앙총회>, 3월 8일 잡보 <북간도통신>, 1914년 4월 5일 <간민회폡산별보>, 1914년 4월 12일 논설 <북간도동포의게> 등을 들 수 있다. 서간도 소식으로는 1914년 7월 12일의 <신흥교우보의 鿡도>(제5호), 7월 19일 <셔간도의 근황>, 8월 2일 <셔간도긔황을 구제평일로> 등을 들 수 있다.

권업회는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단체였으므로 친러적인 기사들도 자주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1913년 3월 9일자 논설 <루시아황실 삼꟢년긔념일 경썂숑---우수리거류폁鏅 한인젼톄를 韡표폁야>를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권업신문에서는 재러한인의 권익옹호, 재러한인의 계몽과 민족의식의 고취, 항일관련기사 등에 대한 내용들을 다수 싣고 있다. 즉 농작지개척활동, 교육의 보급 등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계몽활동, 민족의식의 고취, 항일기사의 수록 등을 통하여 독립운동기지건설, 군자금 마련 등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러시아에서의 한국인의 안정된 지위 마련을 위하여 한국인의 입적청원활동을 지원하였으며, 또한 친러적인 기사 등을 일부 게재함으로써 러시아 당국과의 원만한 관계 조성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그러나 권업신문에는 무장투쟁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이라던가, 독립후 건설할 국가상에 대한 기사등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특히 전자와 관련하여 권업신문의 발행 주체인 권업회에서도 무장투쟁을 전개할 기지 마련이나 군자금 모집 등을 은밀히 추진할 지언정 실제 무장투쟁은 전개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권업회가 러일 전쟁등에 대비한 독립전쟁론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또한 러일간의 외교적 분쟁을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곤다찌 총독의 조선인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4년 8월 블라지보스또크에는 계엄령이 발표되었으며

) 권업신문 1914년 8월 9일 잡보 러일관계는 돈독해지게 되었다. 이에 러시아주재 블라지보스또크 일본영사관에서는 러시아 당국에 권업회와 권업신문을 폐지해 줄 것과 이종호, 이동녕, 김하구, 오주혁, 이갑, 안공근 등 블라지보스또크, 노보끼예브스크, 니꼴스크-우수리스크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운동자들을 러시아에서 추방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 1914년 8월 20일자로 블라지워스또크 일본 영사관에서 No. 184로 연해주 군지사에게 보낸 전문(馱스크 문서보관소 소장) 러시아 관헌들은 일본측의 요구에 따라 1914년 8월 7일(러) 권업회의 해산을 결정하고 이종호를 추방하였으며

) 1914년 8월 21자로 국방부 산하 연해주 군지사,헌병사령부 제4부 제2과(블라지워스또크 소재)에서 연해주 총독에게 보낸 문서(ܜ. ܒ. ܔ. ܒܾܵܽܽ݋ܸ ܓܱ݂ܾ݃ܵ݀ܽܰ݀ ܟܸܼܾܾܸ݀݀݁ܺ ܞܱܻ݂ܸܰ݁ - ܾܿ- ܾܱܻ݂ܾܼܰ݁ܽ݃ ܻܸ݃ܿ݀ܰܲܵܽݎ ܾ݂ܴܻܸܵܵܽܵ 4 ݂ܾܻ݁ 2 No. 503338 ܳ.

ܒܻܴܸܾ݂ܾܰܲ݁ܺ-- ܟܸܼܾܼ݀ܰ݃݀݁ܺ݃ ܓܻܵܽܵ݀ܰ ܓܱ݂ܾ݃ܵ݀ܽܰ݀݃, 馱스크 문서보관소 소장) 권업신문의 간행을 금지하였다.

) 김정주, 앞의 책, p. 619 그러나 권업회는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와 연해주의 여타 지역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 박보리스, 앞의 논문, p. 1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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