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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언

崔才亨은 일명 崔在亨이라고도 하며, 그의 러시아 이름은 최 뽀또르 세메노비치이다. 그는 함경북도 慶源의 노비출신으로서 1860년대에 경제적인 이유로 러시아 沿海州로 도주하여 1880년대 러시아에 귀화한 뒤, 그 지역의 都憲 및 자산가로 성장하여 재러한인사회를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였으며,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가장 신망받는 친러적인 인사였다. 그는 1905년 이후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에 참여하여 1920년에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에게 처형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1900년대에는 러시아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의병조직인 同義會의 총재로서 뿐만 아니라, 블라디보스톡에서 발행된 민족 언론인 {大東共報}와 {大洋報}의 사장으로서 활약하였으며, 1910년대 초반에는 勸業會의 총재, 1919년 3 1운동 이후에는 大韓國民議會의 명예회장으로 활약하는 등 1900년대부터 1920년까지 러시아지역에서 조직된 주요 단체의 책임자로 일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3 1운동 이후 上海에서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한국독립운동사상의 중심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가 1920년 4월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일제에 의해 총살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였던 李東輝는 다음과 같이 그의 활동을 칭송하며 죽음을 슬퍼하였다.

상해 거류민단 주최로 고 최재형, 양한묵 양선생 및 순국 제열사의 추도회가 지난 22일 오후 8시에 동단에서 거행되다. 고 최재형씨의 역사를 이동휘씨가 술하다.

ぢ최재형선생의 역사를 말하자면 한이 없겠소, 선생은 원래 빈한한 집에 생하야 학교에 다닐 때는 설상에 맨발로 다닌 일까지 있소, 선생이 12세시에 기근으로 인하여 고향인 함경북도 경원에서 渡俄하야 사업에 착수하여 크게, 교육에 진력하였소, 학생에게 학비를 주며 유학생을 연연히 파견하였소, 선생은 실로 아령의 개척자이었소, 선생의 이름은 아국인이라도 모르는 자가 없었소, 또한 당시에 郡자치회 부회장이 되며, 다대한 노력이 있었소. 또한 年前 한일조약의 수치를 참지 못하고 안중근씨와 합력하야 한 단체를 조직해 가지고 희뢰 등지에서 왜적을 토벌한 사실이 있소. 그리고는 작년 3월 이후에 임시정부 재무총장에 피임되었섰소, 如斯한 위대한 노력을 하다가 지난 4월 5일에 불행히 적에게 포박되어 적은 야만적 행동으로 공판도 없시 씨를 총살하였소.

즉, 최재형이 俄領의 개척자로서 항일투쟁에 적극 동참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국내에서 발행되고 있던 {동아일보}에서도 그의 죽음을 대서 특필하였다. 즉, {동아일보} 1920년 5월 9일자에서도,

지난 4월 4일에 해삼위에서 로군 군대와 일본군대가 교전하게 된 이래로 신한촌에 있던 일본을 배척하는 조선사람들은 형태가 위태함으로 니코리스크로 몸을 피하여 로서아 과격파와 연락을 하여 가지고 일본군에게 반항하다가 육십칠명이 체포되여 그 중에 원 상해가정부 재무총장 최재형 외 3명은 일본군에게 총살당하였다함은 작지에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최재형은 금년 63세의 노인이요, 함북 경흥 태생이니 어려서부터 가세가 매우 곤궁하야 그가 열살되었을 때에 할일없이 그 부모를 따라 멀리 두만강을 건너 로시아 지방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곳으로 건너간 뒤에도 몇해 동안은 또한 로국인의 고용이 되어 그 주인에게 충실하게 뵈었음으로 열다섯살 되는 봄에는 주인의 보조를 받아 소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재학 중에도 교장의 사랑을 받아서 졸업 후에는 로국 경무청 통역관이 되었는데, 원래 인격이 있음으로 만인이 신망하게 되어 25세 때에는 수백호를 거느리는 노야라는 벼슬을 하게 되었고, 그는 다시 한푼 돈이라도 생기기만 하면 공익에 쓰고 사람을 사랑하므로 일반 인민의 신망은 나날이 두터워져 마침내 都老爺로 승차하게 되야 수십만인의 인민(로국인이 대부분)을 거느리게 되여 로국의 극동정치에도 손을 내미러 적지 안이한 권리를 가지고 지냈다. 글하여 그는 마침내 로시아에 입적까지 하였었고, 작년에 과격파의 손에 총살당한 니꼴라이 2세가 대관식을 거행할 때에 수십만의 로국인민을 대표하여 상트페트로그라드에 가서 황제가 하사하시는 화려한 예복까지 받은 적이 있으며, 리태왕 전하께서 을미년에 로국 영사관으로 파천하신 후 널리 로만국경에 정통한 인재를 가르실세 최씨가 뽑히어서 하루 빨리 귀국하여 국사를 도우시라는 조서가 수참차나 나리셨으나 무순 생각이 있었던지 굳게 움직이지 아니하였으며, 이래로 그 지방에 있어서 배일사상을 선전하고 작년에 상해 가정부 재무총장까지 되었었는데, 이번에 총살을 당한 것이오.

라고 하여 재러한인사회의 지도자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총장으로 활동하던 최재형이 총살되었음을 애도하고 있다. 또한 朴殷植도 그의 저서 {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최재형은 함경도 경원사람으로 9살 때에 러시아의 연추로 옮겨가서 살았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강인하고 날쌔고 씩씩하여 모험을 감행하였다. 러시아의 글과 실정에 익숙하여 러시아관원의 신임을 얻었으므로 우리 겨례의 노동자를 위하여 비호한 일이 매우 많았다. 두번이나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러시아황제를 뵙고 훈장을 받고, 연추 도헌의 관직을 받으니 연봉이 3,000원이었다. 이것을 은행에 저축하여 두고 그 이자를 받아 해마다 학생 1명을 러시아의 서울에 보내어 유학하게 하였다. 우리 겨레 학생 중 러시아 유학 출신이 많은 것은 다 그의 힘이었다. 그는 비록 어린 나이로 떠돌아 다니며 러시아의 국적을 갖기는 하였으나 조국을 그리워하였으며, 朴泳孝를 만나보기 위하여 일본에 간 일도 있다.

1908년에 이범윤이 거의를 모의하고 최재형을 대장에 추대하니 주러시아공사 이범진이 3만원을 보내어 자금으로 삼게 하였다. 이에 安重根, 張鳳翰, 崔丙俊, 姜晩菊, 曺恒植, 白圭三, 吳河泳 등이 군무를 분담하여, 그해 7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경원의 新牙山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전진하여 회령의 永山에서 크게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고 로령으로 돌아갔다. 오랜 후에 군자치회의 부회장이 되었으며, 맏아들 雲鶴은 러시아군의 장교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 국민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그는 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4월 일본병이 러시아의 신당과 싸워 雙城을 습격 파괴하고 죄없는 수많은 우리 겨레들을 함부로 체포하였다. 그래서 최재형은 金理直, 黃景燮, 嚴柱弼 등과 함께 모두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라고 하여, 최재형의 교육활동과 의병활동에 대하여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편 일제측에서도 최재형을 독립운동의 주요 인물로서 주시하고 있었다. 즉 일본외무성 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는 {不逞團關係雜件 鮮人의 部 在西比利亞 5}) 중 [大正 3년∼5년, 排日鮮人의 部] <최재형이력>에,

崔才亨 61세, 현주소 노령 연추, 원적 함북 경원.

혹은 崔在亨이라고도 한다. 오랜동안 연추의 도헌이어서 재주선인으로부터 최도헌이라고 敬稱된다. 러시아의 훈장과 휘장을 13개나 소지하고 있다. 엄인섭의 숙부, 故 李範晉의 종질, 러시아 귀화인, 성품이 강직하고 怜悧, 어려서 부친을 따라 연추에 이주해서 18세 때 러시아병영의 통역이 되고, 다음에 러시아 해군소위, 경무관 등에 봉직, 35세의 저문때 통역을 사직하고, 연추지방 재주선인의 대표자로서 도헌으로 15개년 근무, 러시아황제 즉위식에는 주민을 대표해서 갔었고, 그 후 연추 군대의 어용상인으로서 우육 등을 납품하고, 거만의 자산을 가졌으나 작년 사업에 실패해서, 가산이 기울어 소유의 토지를 경매에 붙었고, 1908년 4월 이위종, 이범윤 등과 발기해서 동의회라고 하는 배일결사를 조직한 한사람으로서, 당시 군자금으로서 동회에 1만 3천원을 출금하고 일찌기 국민회 블라디보스톡 지방회 평의원 및 회장, 블라디보스톡 권업회장, 동회 총재, 鮮人 노령이주50년기념제 발기인, 동회장, 치따 발행 대한인정교보 찬성원 등 노령에 있어서 배일선인의 수령으로서 항상 국권회복의 폭거를 기획.

라고 하여 최재형을 노령에 있어서의 항일독립운동계의 '수령'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최재형은 러시아지역에서 일제에 대항하여 투쟁한 민족해방운동계의 가장 주요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의 생애에 대하여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이것은 최재형에 대한 자료가 그만큼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 한 러수교가 이루어진 후 러시아와의 학문적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최재형의 자녀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그들을 통하여 자료를 다수 입수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최재형의 아들 최 왈렌찐과 딸 최 올리가 등이 각각 작성한 부친에 대한 회고록과 생존해 있는 그의 딸들인 최 올리가, 최 류드밀라, 최 엘리자벳다 등과의 면담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1905년 이전의 최재형의 가정환경과 성장과정, 도헌이 되기 전까지의 상황 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다음으로는 최근에 공간된 러시아발행 한글신문인 {해조신문}, {대동공보}, {권업신문}, {청구신보}, {한족신보} 등을 주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외무성 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는 러시아 한인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들도 새로운 것들이다.

필자는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최재형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이에 먼저 본고에서는 그 일환으로 최재형이 1905년에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하기 이전까지 어떠한 활동을 폈는가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부분은 1905년 이후의 최재형의 항일노선과 운동의 성격을 이해하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에 대한 검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1905년 이전의 최재형에 대하여 살펴보기 위하여 우선 최재형의 가정환경과 러시아로의 이주 경위에 대하여 살펴보고, 이어서 최재형의 가출과 선원생활, 도로통역과 도헌에의 선출, 자산가로의 성장 등의 순으로 밝혀보고자 한다.

2. 가정환경과 러시아로의 이주 경위

衁. 조선말 함경도 지방의 흉년과 최재형가의 러시아로의 이주

최재형은 1860년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노비 최형백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부친 최형백은 그 당시 경원 지주의 머슴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1869년 7월 함경도 지역에 홍수가 나서 많은 동포들이 굶어죽는 참경이 벌어지자 최재형가의 생계는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당시 일반 백성 중에 생존을 위해 만주와 러시아지역으로 몰래 이주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최재형가도 생존을 위해 방책을 찾아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노인들로부터 두만강을 건너가면 비옥한 땅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에 최재형가는 최재형이 9세시인 1869년 9월 9일 할아버지, 부모님, 형과 함께 연해주 포시에트지역 지신허로 도망하였다. 최재형가가 러시아로 이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살고 있던 경원 지역이 두만강을 끼고 있는 북만주 또는 러시아 연해주로 나가는 출구인 琿春과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재형가가 이주한 지신허는 1864년 봄에 茂山 사람 崔運寶와 경흥 사람 梁應範이 몰래 두만강을 건너 새롭게 개간한 곳이다. 당시 이곳 연해안에는 중국인 10여호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 외에 黑頂子(연추지대의 한지점)에 러시아 군인이 약간 주둔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후 경흥, 온성 등지에서 몰래 지신허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865년에 한인 부락이 형성되었고, 이곳에 이주한 동포들은 만주土匪인 紅鬚賊을 방어하기 위하여 私砲隊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최재형가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대를 갖고 이주하였던 지신허 역시 어렵기는 매 한가지였다. 뒤바보가 작성한 {아령실기}에는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 依接할 家幕도 없고, 게다가 호구할 양식도 없어 형용할 수 없는 飢寒을 절규"하는 상황이라고 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에 연해주 군무지사 푸루겔름은 군무지사의 권한으로 블라디보스톡 창고로부터 4,000푸두의 저질 보리와 2,000푸드의 밀가루를 방출하여 빈곤한 한인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의 경제난을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1870년 봄이 되어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연추, 목허우(포시에트), 지신허 등지에 굶어죽은 시체가 길가에 널려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은 월경죄 때문에 다시 고국으로도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러므로 지신허에 정착한 농민들 가운데는 생존을 위하여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컨대, 지신허 빈민 가운데 96명은 청나라 배 3척에 나누어 타고 추풍으로 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블라디보스톡에 이르러 배가 암초에 부딪쳐 22명이 익사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하였다. 그리고 생존자는 러시아인의 구원을 받아 흐림물에 상륙하여 하루에 10리를 걸어 8일만에 겨우 소왕령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과거에 러시아군인들이 주둔하였던 토굴에 임시 거처하며 개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그해에는 황무지를 개간하고 옥수수와 감자를 심어 겨우 연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어려운 시절에 최재형가 역시 지신허에서 경제난에 허덕였다. 그 후 몇해 동안 최재형은 러시아인의 고용으로서 일하였다.

遁. 러시아 한인사회의 교육과 최재형의 러시아학교 입학

1864년 봄 이후 지신허에 한인들의 이주가 증가하여 점차 한인부락들이 생겨났다. 이에 따라 동포들은 자연히 자제들의 공부를 위하여 부심하였다. 그리하여 한인들에 의하여 자제들을 위한 교육시설이 설립되었는데 그 교육내용은 조선에서의 교육을 답습하는 정도였다. 즉 그들은 공자 맹자 등 전통한학을 가르치는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러시아당국에서는 이주 한인들을 러시아화하기 위하여 1870년부터 러시아극동지방에 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지역에 한인을 위한 교육기관이 처음 설립된 것은 1872년 최재형이 살고 있던 지신허와 얀치헤에 러시아정교 교회가 설립되면서 부터이다. 동년에 바실리 삐얀꼬프 목사가 지신허 교구에 한인학교를 창설된 것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이 학교의 수업은 러시아어로 행해졌고, 모국어로 교육하는 것은 금지시켰다. 또한 교육내용도 러시아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인들은 이에 적극 협조하지 않았다. 1883년의 기록이기는 하나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즉 러시아학교가 연추에 설립되어 취학연령에 이른 한인자제를 모집하였다. 이때 어떤 부모는 이를 기피하다가 부득이한 경우에 이웃집 자제에게 품삵을 주고 대신 학교에 다니게 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설령 자기 자제를 취학케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는 고상한 인격을 배양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즉 당시 재러한인 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는 러시아 학교에 자제를 보내지 않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이러한 보통 분위기와 달리 최재형의 부모는 자식을 러시아학교에 보냈다. 그것은 최재형의 집안이 별로 내세울 것이 없었던 노비의 집안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하여 최재형은 한국인으로서 러시아학교에 입학한 첫 학생이 되었다.

당시 최재형의 집안은 곤궁하여 그의 학비를 대줄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때문에 그는 고용주인 러시아인의 도움으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재형의 학교생활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것 같다. 뒤바보가 작성한 {아령실기} [교육]란에는 빈한하게 고생하며 공부한 대표적인 인물로서 최재형을,

빈곤하기 때문에 취학하기 불능한 사실의 일례를 든다면 최재형씨의 幼時 고학한 것이 실증이 되었다. 그가 러시아학교에서 수업할 때에 그 빈한함이 뼈에 사무쳤는지, 굿을 하는 집에 가서 떡 조각을 빌어 먹어 허기를 채운 일도 있었고, 三冬이면 양말과 신이 없어서, 짚단을 가지고, 눈위를 걸어다니다가 그 짚단을 펴고, 跌足의 凍氣를 禦하였다고 한다.

라고 하여, 최재형이 어려운 가운데 고학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3. 최재형의 가출과 선원 생활

러시아학교에서 공부하던 최재형은 그의 일생의 전환점이 되는 가출을 시도하게 된다. 경제적인 어려움 외에도 형수와의 갈등이 깊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최재형의 자녀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부친에 대한 회상기 [19세기 말 및 20세기초 한인들의 반일투쟁 시기 최재형이 벌인 계몽 및 민족해방운동]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자 형이 결혼을 했다. 사실은 기뻣지만 그에게는 노는 것이 불행이었다. 형수는 시동생을 미워하였던 것이다. 시일이 흐를수록 최재형은 형수에 대한 반감이 커갔다. 형수의 잔소리 등이 듣기 싫어서 그는 부모집에서 튀어 나왔다.

가출한 최재형은 포시에트에서 상선의 어린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선장과 부인은 최재형을 귀여워하여 자기 집에 살게 하고 세례를 받게한 후 뽀트르 세묘노위츠라는 러시아 이름도 지어 주었다. 최재형은 선장부부의 만남을 통해 로어를 공부하고 교양을 넓힐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항해를 통하여 견문을 넓혔는데 특히 러시아의 수도 뻬쩨르부르크의 방문등은 시골 소년인 최재형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최재형의 자녀들은 가출 이후 최재형의 삶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장의 아내는 소년을 불쌍히 여겨 친아들처럼 받아드렸다. 원양 상선 선장과 그의 부인의 이름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그들은 향후 블라디보스톡을 떠났다.

선장이 소년을 아내에게 데려오자 그의 부인은 잘 씻겨주었고 선원복을 입혀주었다. 최재형은 러시아어를 몰라 애를 태웠다. 바다 세월이 꽤 흘러 그동안 최재형은 러시아말을 꽤 하게 되었고, 책도 제법 읽게 되었다. 서양문명도 파악하게 되었다. 선장의 아내는 인테리로서 소년에게 러시아어 뿐만 아니라 유럽의 문화와 인간에 필요한 학과목을 가르쳐 주었다. 최재형도 열심히 공부하였다. 향후 그들 사이는 부모와 친아들 같은 사이가 되었다. 세월은 흘러 최재형은 러시아말을 유창하게 하게 되었고, 또 중국어까지 배우게 되었다. 결국 이로서 최재형은 헐벗고 굶주린 소년에서 유식한 인테리가 되었던 것이다. 선원 생활에서 그는 상당한 생활 경험을 얻었고, 외국 체류시 그 나라 사람들의 생활도 알게 되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체류시에도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최재형은 6년동안 상선대에서 일하면서 그동안 블라디보스톡과 뻬쩨르브르크를 다니면서 그 거리를 합하면 세계를 거의 두번이나 돈셈이다. 뻬쩨르브르크를 두번째 갈 때에는 그의 나이 17세였다. 그는 선원들과 여러 항구를 들릴 때마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익힐 수 있었다.

6년 동안의 선원 생활을 통하여 최재형은 러시아의 언어와 러시아인들의 생활방식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견문도 넒혀 러시아에 대하여 정통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1877년 항해에서 돌아오자 그는 1878년부터 블라디보스톡에 정착하게 되었다. 선장의 배가 낡아서 더이상 항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장은 그를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자신의 친구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톡에 있으면서 장사에 대한 많은 일들을 배웠다.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생활은 앞으로 최재형이 블라디보스톡과 연추 등지를 중심으로 생활해나가는 인적기반, 특히 러시아인들과의 유대 관계를 돈톡히 하는데 중요한 토대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최재형은 상선에서 6년동안 일하였기 때문에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러시아 상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4. 연추로의 귀향과 도로통역을 통한 재러한인사회에서의 지위 구축

블라디보스톡에서 1878년부터 1881년까지 회사에 근무하면서 어느 정도의 자산을 모은 최재형은 부모님과 형을 생각하게 되었다. 최재형은 1881년 포시에트 구역에 가서 아버지와 형의 거처를 수소문한 결과 그들을 안치혜에서 찾아냈다. 얀치혜촌은 노보끼예브스크에서 3-4뵤르스타(1 뵤르스탄는 1.067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1890년에 이 지역을 방문한 영국의 비숍여사는 이 지역의 주변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평평한 지역은 깊고 비옥한 검은 흙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모든 곡식과 식물들이 매우 잘 자란다. 모든 곡물들이 여기 모여져 있었으며, 땅은 깨끗하게 경작되여 있었다.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의 촌락들은 한국에서라면 매우 강력한 지배계층의 저택일 그러한 집이 많았다. 한국인 촌락은 그 지역 주위에 산재하고 있었다. 그 주위에 큰 부류에 속하는 촌락들은 보통 9십 2만평의 비옥한 농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런 땅에 보통 140여 세대가 거주한다.

비숍여사도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얀치혜는 토질이 좋은 곳이므로 최재형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번 돈을 가지고 그곳에 개인농장을 만들어 농사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한편 최재형은 조선과 중국, 중국과 러시아지역과의 국경 지대인 얀치혜에서 18세시인 1878년부터 러시아병영의 통역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러시아어 학교에 입학한 인재로서 러시아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다년간의 해외 선상 생활을 통하여 러시아의 문화에도 대단히 익숙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당시 연추지역에는 최재형처럼 러시아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최재형은 러시아 해군 소위, 경무관의 통역 등 러시아 군부와 치안 당국의 통역으로 일하면서 이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박은식도 그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러시아의 문물에 익숙하여 러시아관원의 신임을 얻었으므로 우리겨례의 노동자를 많이 비호하였다. 두번이나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러시아황제를 뵙고 훈장을 받았으며"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연해주 당국은 1884년 군사적인 목적으로 조선 국경까지 군사도로를 개설하고자 하였다. 그 도로는 블라디보스톡--라스돌노예--자나드워롭까-바라바시-슬라비얀카--노보끼에프스크---끄라쓰노예 촌을 경유결하는 군용도로였다. 이 군용도로를 건설하는데 러시아어에 능통한 최재형 역시 통역원으로 동원되었다. 그들은 1884년 최재형에게 영군 300명을 거느리고 연추에서 멍고개까지 도로를 건설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도로건설은 노동자들에게 매우 힘든 작업이었다. 도구라고는 삽, 곡괭이, 담가 등 밖에 없었다. 노동조건은 말할 여지도 없었다. 특히 통역 즉 通辭들은 조선인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데 급급하였다. 이러한 통사들의 행위에 대하여 {아령실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통사는) 러시아어를 아는 사람의 칭호인데, 그 종류의 구별이 적지 않다. (중략) 화차나 輪船이나 그 나마 어떠한 노동장이던지 그들의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느 방면으로 보던지 자기 동포에게 이익을 준 것이 10분이라면, 해독을 끼친 것은 100분이 된다. 그네들이 배운 것은 러시아어 뿐, 본 것은 러시아 풍속 뿐, 아는 것은 私利 뿐 그런 까닭에 조국 문명을 경시하고, 또 동포를 草介로 여기는 일이 많았다. 러시아어를 모르는 토공들은 청부인들의 불공정한 행사를 알면서도 항의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다른 통역원들이 노동자를 속이는 등 부당한 행위를 하는 것과는 달리 최재형은 청부인들과 토공들간에 충돌이 발생하면 항상 토공들의 편에 섰다. 노동자들 가운데 일을 마치고 향촌에 귀향한 농민들은 모두 최재형의 인간성, 정당성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다. 결국 최재형은 도로건설에 관여하는 동안 많은 조선인들과 가까워졌으며, 그들의 신임도 얻게 되었다.

5. 도헌에의 被任과 재러한인사회의 지도자로서 성장

衁. 러시아의 행정제도

러시아정부는 19세기에 새롭게 점유한 시베리아지역을 동시베리아 政區와 서시베리아 政區로 나누어 총독을 두고, 관할 구역을 州와 道로 나누어 여기에 軍務知事 또는 知事를 두어 총독에 예속시키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1883년에 이르러 서부총독정구를 폐지하여 이를 독립된 주와 도로 변경하여 러시아에 직속시키고, 동부총독정구는 두개의 구로 분할하였다. 즉 동부시베리아 총독정구와 흑룡총독정구로 이분하였는데, 연해주와 아무르주를 합쳐서, 프리아무르주라고 통칭하였다. 그리고 아무르총독 정구는 총독이 하바로브스크에 있었으며, 프리모르스키이주, 아무르주, 자바이칼주, 사할린주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프리아무르주는 러시아제국에서 파견된 총독의 지배를 받았다. 총독은 군대통수권을 포함한 일체의 정무권한을 위임받았던 행정관이자, 군사령관으로서 절대권한을 행사하였다. 따라서 총독의 견해와 정책에 이주 한인들이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한편 극동지방의 행정편제는 1894년에는 자바이칼지방이 동시베리아 총독의 관할에 귀속됨으로써 분리되었다. 극동 변강의 행정책임자는 총독이었으며, 각 지방의 책임자는 군무지사로 불리었고, 그 밑에 군, 면에 해당하는 행정 단위로써 우에즈드, 볼로스트 등이 있었다.

1884년 러시아당국에서는 농촌부락이 많이 생겨남에 따라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새로운 읍을 만들었는데 얀치혜를 소재지로 한 읍도 형성되었다.

遁. 러시아에 살고 있는 한인들의 지위

1876년 개항을 거쳐 1884년에 朝露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었다. 이를 계기로 최초로 한인 이주에 대한 법적문제가 거론되어 지금까지 방임상태에 있었던 이주 한인들이 생명과 재산의 안정 및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노령지역의 한인들의 법적 지위가 확정된 것은 1888년 朝露陸路通商章程의 체결에 이르러서였다. 이에 따라 노령의 한인들은 3그룹으로 구분되어 1884년 6월 25일 조로수교가 이루어지기 전에 노령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가족당 15데샤치나의 토지를 할당받았으며, 러시아 농민과 같이 금전 및 현물납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884년 국교수립 이후에 이주하여 노령에 계속 거주하기를 희망하는 한인들에게는 2년간 기간을 주고 매년 러시아의 비자를 발급받도록 하였으며, 납세는 첫번째 그룹과 마찬가지로 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마지막 세번째 그룹은 변강에 일시 거주하는 자로서 정주할 자격을 가지지는 못하지만 매년 세금을 납부해야 하고 비자도 발급받도록 하였다.

그후 1893년 두호프스키 총독은 변강의 식민화에 한인들을 동원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판단하고, 한인들을 러시아화시키려고 하였다. 이때 비로소 1884년 이전에 노령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러시아국적을 취득하고 토지를 받게 되었는데 실질적으로는 1895년 9월부터 한인들의 러시아 입적이 허락되었다. 그해 1,500호 정도가 입적하였다. 최재형은 일찍이 러시아로 들어왔으므로 귀화가 허락되었다. 그리하여 최재형은 군인과 공무원에 등용될 수 있는 특전과 토지를 무상분배 받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최재형 등 입적 농민들은 대개 그들의 촌락을 따로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元戶村이라고 하였다. 한편 러시아 국적에 편입되지 못한 한국인 이주민들은 농토를 분여받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할 수 없이 원호나 러시아인들의 토지를 빌려 소작해야 했는데 소작조건은 대단히 불리하였다. 흔히 한인들이 러시아인의 황무지를 소작지로 개간할 때, 처음 2년간은 소작료를 물지 않았지만 3-4년부터는 소작료를 납부하게 되었는데, 지방에 따라 다르지만 소작료는 대개 4할 이상이었다. 그러므로 귀화하지 않은 한인들은 살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한인들이 러시아국적에 편입하기 위하여 러시아관헌에게 각종 방법을 이용하여 교섭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는데, 이때 한국인촌의 자치단체의 중요임무는 외국인 신분을 가진 한국인 이민들을 러시아 국적에 편입시키는 교섭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한편 소작한인의 비율은 1905년에는 30%, 1910년경에는 70%, 1917년경에는 90%에 달하였다고 한다.

1898년 총독 그로데코프도 두호프스키의 정책을 계승하여 첫번쩨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 중 남은 사람들에게 입적을 허락하였고, 두번째 그룹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5년이상 변강에 거주한 사람들에 한하여 입적을 허용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리고 세번째 부류의 한인들에게도 이만, 호르, 키, 아무르강변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하여 주었다. 그러나 1905년 운테르베르게르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한인들에 대한 정책은 일변하여 한인들은 불안한 생활을 영위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鑁. 도헌으로의 임명

러시아당국에서는 1895년 연추지역에 한인촌락이 다수 형성되자 얀치혜촌을 중심으로 새로운 행정단위인 군을 설치하고, 거기에 都所를 설치하고 烟秋南都所라고 명명하였다. 이곳은 러시아관헌의 인허하에 이루어진 한인자치기관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 도소에서는 한국식과는 달리 서양식 사무실인 都所室을 건축하여 러시아의 인허를 받은 기관으로서의 권위를 높히고자 하였다. 아울러 도소에서는 책임자로 都憲이나 社長을 두어 각 촌락에 있는 한인을 관할하고, 모든 賦稅를 수납하는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지방당국에서는 그 책임자로서 최재형을 임명하였다. 35세인 1895년 하반기에 최재형은 통역직을 사직하고 처음으로 연추남도서의 도헌에 피임되었다.

최재형이 연추남도소의 도헌에 임명된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첫째, 연추남도소는 러시아가 인허한 최초의 한인 자치기구이다. 이 기구의 대표인 도헌에 최재형이 최초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재러한인사회에 큰 신망을 얻고 있던 인물임을 반증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최재형이 러시아 지방당국으로부터 가장 신임을 받고 있었던 한국인이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 지방당국에서 최재형을 도헌에 임명하였던 것이다. 최재형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인의 최초 러시아인학교 입학생으로서 러시아에 능통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고학을 통하여 공부한 후 러시아 병영에서 오랫동안 통역으로 일하였다. 그런 가운데 그는 러시아인으로부터 큰 신망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는 여러 통역관들 가운데 연추남도소의 초대 도헌으로 임명되어 1910년경까지 그 책임자로서 연추지역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도헌에 임명된 최재형은 도헌의 직무외에 한인들의 교육활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우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연추지역의 한인교육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연추지역에 한인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 부터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경제적인 여건상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진 것 같지 않다. 그러다가 러시아 지방당국에서 학교를 건립하여 재러동포들에 대한 러시아화 정책을 펴면서 본격적으로 이 지역의 한인들에 대한 교육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지방당국은 1883년에 연추지역에 아문학교를 설립하고 한인자녀를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러시아화교육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것 같다. 1883년 계미년에 러시아학교가 처음으로 연추에 설립되어 입학연령이 된 한인자제를 모집할 때, 한인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혹 어떤 부모는 자제를 러시아학교에 보내는 것을 기피하다가 부득이한 경우에만 이웃집 자제에게 품삯을 주고 대신 공부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비록 그 자제로 하여금 취학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는 일상생활상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지속되어 1884년에도 한인들은 자식을 아문학교에 보내기를 꺼려하여 남의 자제를 대신보내거나, 혹은 마저 읽던 한문을 읽히고 아문학교에 보내곤 하였다. 그 결과 당시 연추 룡명과 추풍에 설립된 아문학교에 학생 20여명이 공부할 뿐이었다. 그후 1884년에 최운학, 채동성이 러시아중학교에 입학하였고, 비로소 1895년에 이르러 연추 최만학과 김택섭, 신익녹 등 3인이 아문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최재형이 연추지역의 도헌이 되었을 때 재러한인사회에서는 적극적인 러시아교육이 실시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에 러시아학교의 최초의 입학생으로서, 러시아 문물에 정통했던 최재형은 한인 동포들에게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나아가 재러동포들의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서 러시아지역에서 처음으로 재러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러시아화교육을 본격화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독립신문} 1920년 5월 15일자 [최재형의 약력]에서도, "아령에 재한 한인의 교육은 처움 씨의 편달을 받아 일어난 것이요, 씨가 거주하는 연추는 아령의 한인 거주지 중 제일 먼저 러시아교육을 받았다 "라고 하여 최재형이 재러한인교육을 처음으로 강조하고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1895년 도헌에 임명된 바로 향산사에 교단과 학교를 건축한 후 학교 교육에 진력하였다. 그 후 그는 한인들이 거주하는 지역마다 교구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연추에 고등소학교(6년제)를 설립하여 학생들의 교육에 진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등소학교를 성공적으로 졸업한 학생들 중 우수한 학생들을 골라 블라디보스톡, 나꼴쓰크-우쑤리스끼, 블라고웨쎈쓰크, 이르꾸츠크, 馱스크 및 기타 지역에 유학하도록 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특히 그는 매년 3천원의 봉급을 전부 은행에 맏기고 그 이자로 매년 1명씩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그 결과 다수의 학생들이 러시아에 유학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명세, 김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최 레프 뻬뜨로비치, 김 로만 이바노비치, 김 야꼬브 안드레예비치 등을 들 수 있다.

그후 최재형은 재러동포들 사이에 그 이름이 더욱 널리 알려졌으며 러시아인들 가운데도 명망이 높아져 한국인과 러시아인 사이에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최재형은 러시아황제가 주는 훈장을 여러개 받았을 뿐만 아니라 1896년 5월에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최재형이 헌신적으로 전개한 재러동포들에 대한 교육사업은 그와 동포사회의 지원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최재형을 중심으로 한인들은 교육사업을 원할히 전개하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러시아 극동 주둔 러시아 육군 및 해군에 식량, 군복, 건재 등을 공급할 목적으로 회사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극동의 방위력 증강을 목표로 이 지역에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막사를 짓는 등 군대의 유지를 위한 많은 사업을 시작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에 이 지역의 도헌으로서 러시아당국의 깊은 신뢰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사정에 능통했던 최재형은 회사를 설립하고 러시아군대의 군납업자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사업이 생각보다 잘되자 최재형은 한인들 마을에 새로운 학교들을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또 우수한 젊은이들을 시베리아, 카프카즈, 크림 등 러시아의 여러 지역에 유학을 보냈다. 이에 따라 유학생 수도 해마다 증가하였다. 나아가 1900년대 초에 연추에 6년제 중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학교의 첫 졸업생들을 러시아 중부지역의 교육기관에 보내어 계속 공부하도록 하였다.

鱁. 녹화 및 원예 활동

최재형은 관상목과 유실수를 많이 심어 한인마을을 녹화시키는 데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1884년 집을 서양식으로 개조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화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1890년에 주민들과 함께 노보끼예브스크(현 크라스끼노)에 처음으로 공원을 만들었으며, 그후 니꼴스크에 공원을, 1916년 슬라비엔카촌에 문화휴식공원을 만들기도 하였다.

한편 최재형은 포시에트촌이 크림반도와 같은 위도선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크림반도에서 장과식물을 실어와 촌락들에다 심도록 권장하였다. 그 당시 슬라비얀카 항구에 러시아군함들이 집결해 늦여름이면 해군 장교들이 딸기 등 장과 열매를 많이 사가기 때문이었다.

한편 최재형은 농장의 수익을 증진하기 위하여 농민들에게 가축과 가금을 많이 사육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소, 돼지, 닭 등 가축사육운동이 활성화되었고, 이에 따라 농민들의 생활수준이 일층 높아졌다. 또한 그는 가축개량사업에도 관심을 기우렸다. 구체적으로 소의 종축개량에 주목하여 무게가 많이 나가고 우유를 많이 생산하는 소를 길러내고자 하였다. 최재형이 이 사업에 주력한 것은 연추 등 러시아 극동지역에 다수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군대가 고기와 우유를 많이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농민들에게 농사와 가축치기 외에 계절어업을 하도록 하였다. 당시 연어알은 러시아인들이 빵과 함께 먹는 주요 식품이었으므로 농민들에게 큰 수입원이 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연어의 산란계절이 오면 연해주 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잡이에 한창이었다. 그들은 한인촌마다 10-15개 그룹을 편성하여 가까운 항구로 가서 강 하구에 그물을 쳐서 연어를 잡았다. 보통 가을 어로 기간은 10-14일간 계속되었다.

6. 자산가로의 성장

衁. 아관파천과 최재형

최재형이 러시아에서 도헌으로서 활동하고 있을 무렵인 1896년 2월, 조선에서는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소위 俄館播遷이 일어났다. 閔妃시해 사건후 불안에 떨고 있는 고종과 친일내각을 타도하려는 친로파 李範晉 등이 서울주재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공모하여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移御하도록 한 사건이었다. 이때 친일내각의 金弘集과 魚允中은 역적으로 지목되어 민중들에게 살해되었고 兪吉濬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새로이 이범진, 李完用 등 정동파가 친로내각을 성립시켰다. 이후 약 1년간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러시아군대의 보호를 받는 처지가 되었고, 자연히 정부는 러시아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이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됨에 따라, 조선정부에는 러시아어 통역관들이 필요하게 되었고, 따라서 연해주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에 러시아의 연추와 추풍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 청년 52명을 불러다가 모두 통역관에 임명하고 월급을 후히 주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金鴻陸을 들 수 있는데, 추풍사람인 그는 러시아대사관 통역으로 고종의 은총을 받아 학부대신으로 귀족원경이 되었고, 그 외 金道一, 兪鎭律, 洪炳逸, 蔡顯植, 金承國, 金仁洙, 金洛薰, 황두진 등은 모두 중앙의 벼슬을 제수받고 그 조상까지 증직되었다. 그 이후 연추와 추풍일대에는 참봉, 주사, 의관, 참서관, 통정 등 한국의 벼슬 직함을 가진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인물들이 국내로 초빙될 때, 러시아지역의 개척자이며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최재형에게도 조선정부로부터 제안이 왔던 것 같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9일자에,

리태왕 전하께서 을미년에 로국영사관으로 파천하신 후 널리 로만 국경에 정통한 인재를 가르실세 최씨가 뽑히어서 하루빨리 귀국하여 국사를 도우시라는 조서가 수참차나 나리셨으나 무순 생각이 있었던지 굳게 움직이지 아니하였으며

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나 연추지역의 도헌에 막 임명되었던 최재형은 국내에 들어오지 않고 계속 연추에서 도헌으로서 일하였다.

그러던 중 1896년 5월 13일 러시아인 사이에서도 명망이 높던 최재형은 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되는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여하여 황제가 직접 하사하는 예복을 받았는데 이는 러시아에 살고 있는 한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린 것이었다. 이후 최재형에 대한 러시아정부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고, 한인사회에서도 그의 권한 과 신망은 더욱 높아졌다고 할 수 있겠다.

遁. 자산가로서의 성장

최재형은 재러동포들에게 유익한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지원이 지원이 있어야 함을 깨달았다. 이에 그는 1890년대 하반기 통역일을 그만두고 건설청부업과 상업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최재형이 도헌으로 활동하고 있던 연추지역은 조선, 중국, 일본과 관련된 러시아의 주요 군사지점으로서 다수의 러시아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수용할 막사 등 건축물과 이들이 거주하는데 필요한 연료, 상품 그리고 이들을 먹일 육류의 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당시 비숍여사는 연추와 접해 있는 포시에트 지역에 대하여,

포시에트만은 크고 멋진 막사와 창고가 있는 하나의 큰 군사 驛舍였다. 여기에는 시민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크지 않는 거리에도 한국인 정착민들이 있었다. 이 한국인들이 블라디보스톡에 공급되는 육류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었다. 우리는 강인하고 건강해 보이는 수많은 한국인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60마리의 멋진 살찐 가축들을 증기선이 있는 항구로 몰고 가고 있었다.

라고 하여 포시에트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톡의 육류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그녀는 연추에 대하여도,

노보끼예프는 거대한 군사도시이다. 또 이곳은 1천명의 민간인들이 뼈다귀 하나라도 줏어 먹을 수 있지 않나 하는 기대에서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주로 중국인과 한국인이다. 한국인들은 이 지역의 인구 구성에 있어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며, 상품과 연료의 모든 수송을 그들의 소가 이끄는 달구지로 수행한다.

라고 하여 이 지역이 군사도시이며, 한국인이 이 지역에 필요한 상품 연료 등의 운반을 모두 담당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비숍여사는,

포시에트만과 노보끼예프 사이에는 1만명의 보병대와 포병대가 있고, 노보끼예프에는 포병대 중 8개 중대와 두개의 바퀴가 있는 24대의 군용마차가 있었다. 현재 노보끼예프에는 1만명 이상의 병사들을 위한 막사가 급속하게 지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남쪽으로의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하며 3일 동안 체류했다. 그 시간 동안 프랑스어를 하는 경찰서장이 나를 몇몇 한국인의 마을로 데려다 주었다. 그 마을의 모든 농업 인구는 한국인이며, 이들은 매우 번영하고 있었다. 거기서 한국의 국경쪽으로 내려가면서 나는 대다수의 한국인 개척자가 일을 잘하고 있으며, 그들 중의 몇몇은 러시아 군대에 육류를 계약 판매함으로서 부를 키워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인은 중국인을 능가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능동적으로 중국령 만주로 가서 여윈 동물들을 싼 값에 매입해서 살이 찌도록 키워 비싼 값에 되판다.

라고 하여 한국인들이 러시아군대에 육류를 판매하며 부를 축적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 연추지역에서 1890년대에 육류판매업 등으로 큰 부자가 된 인물이 최재형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가 자산가로 성장하는데는 한 바실리 루끼츠, 한 엘리세이 루끼츠 형제와 김 뾰뜨르 니콜라예비치, 최 니콜라이 루끼츠 등의 도움이 컸다. 한편 최재형의 부는 극동에서 얻어진 2개의 사건을 통하여 더욱 증대될 수 있었다.

즉, 1900년의 의화단사건, 1904년 이후의 러일전쟁 등 전쟁의 발발은 물품의 운반, 육류의 보급, 막사의 건축 등에 종사하는 한인들에게 큰 부를 가져왔던 것이다. 먼저 의화단사건을 보면, 1900년 청국에서 의화단사건이 발발하여 곧 러시아가 청국을 침범하자 한인들은 군수품 운수사업에 종사하면서 재산을 모으는 경우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지신허의 한익성은 군대에 물품을 대면서, 재산을 모았고, 최봉준 역시 블라디보스톡에서 군대에 물품을 대는 영업을 시작하여 부를 증대시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어서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한인들은 의화단 사건 때처럼 역시 군수품을 운수하였으며, 이때 역시 최봉준, 한익성등은 군대에 물품을 납품하여 큰 재산을 모았던 것이다.

최재형의 경우 역시 최봉준과 마찬가지로 의화단사건, 러일전쟁 등을 계기로 큰 부를 축적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즉 러시아황제의 대관식에 참여한 이후 최재형은 연추 군대의 어용상인으로서 牛肉 등을 납품하여 거만의 자산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최재형은 마을 사람들의 편의와 포시에트 지역의 상업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기도 하였다. 즉 그는 추린, 꾼스뜨 앤드 알베르스, 삐얀꼬프, 마르꼬프 등의 회사를 유치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7. 결어

1990년대 초반에 들어 러시아지역의 항일운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지고 있다. 그 결과 이 지역의 민족운동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들이 개괄적이나마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이동휘 등 특정 인물에 대한 연구 또한 활기를 띄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활동한 대다수의 운동가들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이에 러시아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인물에 대한 연구 차원에서 본고를 작성하게 된 것이다.

최재형은 러시아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인물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그는 러시아에 초창기에 이민한 함경도지역의 하층계층 출신으로 러시아어 통역과 도헌으로 활동한 인물로 더더욱 자산가였던 점이 주목된다.

본고는 러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였던 최재형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이전의 예비적인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즉 1905년이후 최재형의 민족운동을 다루기에 앞서 그의 성장과정과 인적 토대, 사회경제적 배경 등의 부분들이 먼저 밝혀져야만 그의 운동노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이주 이전의 한국에서의 형편, 러시아로 이주 이후의 생활, 특히 선원· 통역· 도헌으로의 활동 등에 주목하였으며, 그가 자산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 등에 대하여도 밝히고자 하였다.

다음의 논고에서는 러시아의 자산가로 성장한 최재형이 어떠한 이유에서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구체적으로 어떠한 활동을 하는지 등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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