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217.3) 조회 수 590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재러한인 민족운동가 金擎天 연구

1. 서언

김경천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현역 일본군 장교로서 후에 광복군 총사령관이 되는 李靑天과 함께 3·1운동이후 滿洲로 망명한 인물이다. 또한 만주로 망명한 이후에는 西間島 지역에 위치한 대한독립청년단의 회원 및 新興武官學校의 敎官으로서 이청천, 申東天 등 3인과 함께 南滿洲 三天으로서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무기구입을 위하여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에서 滄海靑年團(일명 창해소년단), 수청고려의병대, 高麗革命軍 등에서 활동하는 등 러시아지역 항일투쟁을 선도하였다.

김경천은 러시아 내전이 끝난 다음에 上海에서 개최된 國民代表會議에 創造派의 일원으로 참석하는 한편 이에 실망하여 블라디보스톡에 돌아온 이후에는 한족군인구락부를 조직하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 국내에 진공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즉 김경천은 1919년 만주로 망명한 이후 1922년 일본군의 시베리아 철수시까지 러시아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항일운동가였다. 그러므로 1922년 시베리아를 방문한 公民 羅景錫은 동아일보에 연제한 {露領見聞記}(五) 1922년 1월 24일자 중 [警天 金將軍]이라는 제목하에,

조선의 유지청년이 노령에 수천수만이 출입하였으나 김장군 같이 위대한 공적을 성취한 사람은 없나이다.

김군이 노령에 入하면서 警天이라 개명하였으므로 노령에서는 金光瑞라는 본명은 알지 못하고 警天 金將軍이라면 내외국인이 별로 모르는 이가 없나이다.

라고 하여 그가 시베리아 일대에서 널리 알려진 항일투쟁가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일본육군사관학교 騎兵科 출신으로서 시베리아에서 투쟁시에도 白馬를 타고 기병부대를 주로 지휘하였으므로 흰 말을 타고 만주 시베리아를 누빈 항일영웅으로서 전설적인 인물로 인식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항일독립운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김경천에 대하여 별로 주목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항일영웅이면서도 수수께기의 인물로서만 알려졌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82년 일본 東京 自由社에서 출판된 林隱 著, {北朝鮮王朝成立秘史:金日成正傳}에 그의 말년 행적이 일부 알려짐으로써 김경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증대되었으나 연구차원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최근 1998년 8월 15일 김경천이 독립유공자로서 대통령장을 포상받게 됨과 아울러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그의 유족 2남 4녀 가운데 생존해 있는 막내아들 김기범(러시아 노보고로드 거주, 1932년생)과 막내 딸 김지희(카자흐스탄 카라칸다 거주, 1928년생)가 한국을 방문하게 됨으로써 그들의 증언과 회고, 김경천 및 가족 사진 등이 공개되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김경천의 생애가 알려지게 되어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그러나 김경천의 러시아 지역에서의 활동에 대하여는 아직 기초적인 연구 단계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김경천은 1920년부터 1922년 사이에 연해주지역의 쉬마코프카, 올가군, 뽀시에트, 아누치노, 이만, 수청 등지에서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이에 대한 자료는 러시아 극동문서보관소 등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앞으로 러시아 자료 등의 입수를 통하여 김경천의 항일투쟁은 물론 러시아 지역 한인 민족운동의 전체상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후손들의 요청에 의하여 러시아 비밀첩보기관에 있는 김경천 관련 자료들 역시 발굴되어야 할 것이다.

2. 김경천의 집안--무관집안출신으로 아버지는 일본 유학한 軍器廠長인 구한국군 장교

金擎天의 본관은 金海이며, 본명은 金光瑞이고. 별명은 金警天, 金敬天, 金應天이다. 咸南 北靑郡 新昌邑 昇坪里에서 1888년에 6월 5일에 출생하였으며, 본적은 서울 사직동 166번지이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顯忠이다.

김경천의 부친은 金鼎禹(1857-1908)이며, 어머니는 尹玉蓮이다. 김경천은 5남 1녀 중 막내아들이다. 김경천의 집안은 士族출신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부유한 무관집안이었던 것 같다. 즉 김경천의 생존자녀들의 회고를 바탕으로 김경천의 장녀인 金知利의 장남 김 이브게니가 작성한 {김경천에 대한 회고}에,

조모로부터 듣기로는 양가 모두 서울의 양반가문출신들로서, 결혼잔치만 7일동안 할 정도로 모두 부유한 집안들로서 저희의 증조부, 종증조부, 모두 조선군 지휘관으로 근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라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다.

김경천의 아버지인 김정우는 갑오개혁의 발발이후인 1894년 11월 警務廳 摠巡敍 判任官 六等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895년 5월 당시 35세의 만학의 나이로 일본에 유학하여 慶應義塾에 입학, 동년 11월 21일 경응의숙에 入社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김정우와 함께 경응의숙에 입학한 조선인은 총 114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경응의숙에 설치된 특별교육부에 입학하였으며, 보통과에서 어학을 비롯하여 보통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897년 8월에 보통과를 졸업하고, 동월 東京 神田區 順天九合社 工業 豫備科에 입학한 후, 9월에 공업예비과를 졸업하였다. 그후 9월에 동경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입학한 후 1899년 졸업하였다. 그리고 동월 東京砲兵工廠 銃彈製造所를 見習하고, 1900년 9월에 총탄제조법에 관한 공부를 마치었다. 그리고 10월에 귀국하여 군부의 기사, 군기창기사 등으로 일하였으며, 1904년 9월에는 육군 포병 參領, 1905년에는 軍器廠長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06년에는 정 3품 군기창장으로서 육군 포병 副領이었던 것이다. 즉 김경천의 부친은 일본에 유학한 인물이며, 軍器에 대한 전문가로서 구한국육군의 최고위층의 인사였던 것이다.

김경천은 유정화(호적명, 柳貞(1892-1971)와 1909년 결혼하였다. 유정화는 경기도 고양군 龍江面 거주 柳桂俊 딸이다. 그녀의 집안 역시 부유하였다.. 김경천이 일본으로 유학가기 1주일 전에 혼인잔치가 벌어졌다. 김경천은 일본으로 떠나기전 그의 부인에게 피아노를 사주고, 배우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김경천은 부인을 일본으로 불러 일본육군사관학교가 있는 千葉縣에서 그의 두딸 知利와 知慧를 낳았다.

3. 부친의 영향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 留學

김경천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군인이 되고자 하였던 것 같다. 특히 그는 어려서부터 나폴레옹을 흠모하였다고 한다. {김경천에 대한 회고}에,

어머님(김경천의 부인 유정화--필자주)이 말씀 하시길 유년시절 어느날 김경천은 서점에 들러 서가의 책을 들러 보다가 {나폴레옹}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책을 읽은 감동은 가슴깊이 강하고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그는 장차 군인이 되기를 열망하다가 이윽고 이를 결심하였다.

라고 하여 그가 나폴레옹과 같은 군인이 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점은 김경천이 나폴레옹을 존경하였던 점도 있지만 그의 집안이 무인 가계였기 때문에 더욱 그가 어려서부터 이러한 데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김경천의 군인이 되고자 하는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김경천에 대한 회고}에서도,

그런데 그의 경우 이를 위해서는 멀리 나갈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중조부, 부친, 숙부가 병조판서를 지낸 무인의 가계였기 때문이다. 그의 형들 역시 모두 장군이었다. 정말 한가족에 있어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어머니가 말씀 하시길, 김경천은 집안의 다섯 번째 장군이었다고 했다. 바로 이러한 생의 열마응로부터 김경천은 일본어를 철저하게 익히면서 지원자들에 대한 면밀한 심사에도 불구하고 일본육사에 입학하였다. 정말 당시의 경쟁률은 100:1이었다.

라고 있듯이 김경천은 일본육군사관에 들어가는 꿈을 이루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육군중앙유년학교를 다녀야 했다. 이 학교에서 예과 3년, 본과 2년을 졸업해야 했다.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사관후보생으로서 일본전국의 각 연대에 배속받아 6개월 동안 부대근무를 하게 되어 있다. 당시 육사를 들어가는 길을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유년학교를 거쳐 들어가는 것이며, 또 하나는 일반 중학교를 졸업한 후 시험에 합격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중학교 출신이 유년학교 출신과 다른 점은 부대勤務가 반년간 더 많다는 점이다.

김경천은 서울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육사에 입학하였다. 즉 그는 1909년 12월 유일한 한국인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육사 제23기생으로 입학, 1911년에 졸업하였다. 김경천이 일본육사에 진학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부친 김정우가 일본에서 유학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서 구한국정부의 參領으로 있던 그의 아저씨의 주선이 도움이 되었다.

육군사관학교 재학시절 김경천은 우선 일본식 군사교육을 철저히 받았을 것이다. 즉, 당시 육군사관학교는 군사학의 경우 전술학을 주로 하여 병기학, 지형학, 축성학, 교통학 등과, 術科로는 교련, 陣中근무, 검술, 사격, 馬術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 술과 실시에 필요한 각 兵科의 操典, 敎範, 野外要務令 및 內務· 禮式에 필요한 內務書, 陸軍禮式 등도 교육하였다. 아울러 천황에 대한 충성심, 공격정신, 책임관념, 무사도 정신 등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김경천은 군사교육뿐만 아니라 육사에서 중국어, 러시아어 등 어학도 교과과정에 편성되어 있었으므로 공부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의 교육은 김경천이 일본의 전략, 전술, 일본인의 심리상태 등을 이용하여 보다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4. 만주로의 망명과 대한독립청년단, 신흥무관학교 등에서의 활동

김경천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재학시절 일제에 의해 한국이 강점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이에 김경천은 후배들인 육사 26기 이청천, 洪思翊 등과 함께 조국광복을 위한 맹세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육군사관학교 45기인 李炯錫이 회고를 보면,

홍사익의 말을 들으면 그는 한참 혈기 왕성한 때에 유학을 갔다가 조국이 강압적 합방을 당하고 보니 그 젊은이들의 비분강개야 말로 不可形言으로 안절부절이었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요꼬하마인가 어딘가 시골 어떤 요정에서 大呼痛飮한 끝에 어떤 사람은 곧 전원이 퇴학하고 돌아가자느가 하면 어떤 사람은 二重橋앞에 가서 전원이 自決하여 이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풀어보자고 하였는데 결국은 지청천의 주장에 따라 우리가 이왕 군사훈련을 받으러 온 것이니 배울 것은 끝까지 배운 다음 장차 中尉가 되는 날 일제히 군복을 벋어 던지고 조국광복을 위하여 총궐기하자는 맹세로서 결론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라고 있듯이 일본육사 재학생들은 이청천의 주장에 따라 요코하마의 맹세를 통하여 임관후 적절한 기회를 바 탈출하여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김경천 역시 일제의 조선 강점을 계기로 독립의 의지를 갖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육사를 졸업한 김경천은 東京 제1사단 기병 제1연대에서 근무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육사 26기, 27기 후배들과 자주 접촉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배들과 만날 때마다 요코하마의 맹세를 되새겼을 것이다. 그는 1916년 12월 제26, 27기생 가운데 洪思翊, 李應俊, 尹相弼, 金鍾植 등 동경 제1사단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장교들이 발기인이 되어 친목단체인 全誼會를 만들자, 그는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비록 이 전의회는 표면상 친목단체이긴 하였으나 내면적으로는 국제정세와 조선의 상황 등에 관하여 그리고 자신들의 향배에 대하여 논의하는 자리가 되엇을 것이다.

1916년 김경천은 청원하여 휴가를 얻었다. 그리고 귀국한 그는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즉 김경천은 동지들을 물색하는가 하면 일면으론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팔아 자금을 준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편 김경천은 이때인 1916년 10월 10일자로 자신의 본관을 김해에서 始興으로 변경하였다. 즉 김경천은 시흥 김씨의 시조가 되었던 것이다. 경기도 시흥에 특별한 연고가 없던 그가 시흥을 본관으로 한 것은 아마도 자신의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김경천에게 탈출을 위한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東京에서 있었던 2·8독립선언이었다. 시베리아로 자신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찾아온 동아일보기자와의 갖은 면담에서(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 김경천은,

일천구백십구년에 전무후무한 세계적 회의가 열리고 각 少弱民族에게도 권리를 준다함에 우리 동경유학생이 독립운동의 첫소리를 발하였소. 이때 나는 동경에서 사관학교를 마치고 일본육군기병 제1연대 사관으로 있을 때이라. 꿈속같이 기쁜 중에도 불보듯 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소. 그리하여 병으로 수유를 얻어가지고 이월 이십일에 경성에 도착하니 도처에 공기가 이상스러웠소.

라고 하여 동경에서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2·8독립선언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그 영향으로 그는 병을 칭하고 휴가를 얻어 2월 20일 서울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이때 육사 3년 후배인 이청천과 이응준도 귀국하였다. 그들은 매일같이 사직동에 있는 김경천의 집에 모여 나라의 일에 통분을 나누기도 하고, 자신들의 갈길에 대하여 토론도 하였다. 그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결의하였다.

만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 김경천은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표면적으로는 당구를 치고 밤에는 술집을 드나들면서 헌병대의 눈을 속였다. 즉 그는 장안의 유명한 기생 玄桂玉(妓名은 秋江) 의 집에 드나들기도 하고 麗華園이라는 중국요리집에서 당구와 술로 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서울에 와 있던 몇 달 안되는 동안 李堈公(의친왕)의 애인과 염문을 뿌려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김경천에 대한 회고}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모든 독립운동에 대한 준비가 끝난 후, 김경천은 한국으로 돌아왔고, 근본적인 활동 즉 지하혁명활동으로부터 일본인들의 주의를 따돌리기 위해 방탕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마치 육사졸업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김경천의 자식들이 그들의 사랑하는 어머니 유정화의 이야기에 의해 기억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일제의 주의를 따돌리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일본노름을 하는 도박장과 당시 젊은 사람들이 다니던 유흥클럽들에 출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반복하건테 이 모든 것들은 사전에 계획된 것들이었다. 김경천의 이러한 행동은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의 사이에 미리 이야기 된 것들이었다. 이 모든 것은 인생의 높은 뜻, 즉 그들의 사랑하는 조국을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즉, 김경천은 사전에 철저한 계획하에 만주로 탈출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갖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던 것이다. 한편 일본군 당국은 3.1운동이후 김경천과 이청천 등 뿐만 아니라 그들의 부인들에 대한 감시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1919년 6월 초 만주로의 망명 기회를 잡은 김경천은 평양에 있던 이응준에게 연락하였다. 그러나 이응준은 일정 및 코스의 변경으로 함께 가지 못하였다. 이에 김경천은 1919년 6월 6일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의 망명을 단행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김경천은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기자와의 면담에서,

그러더니 삼월 삼일에 독립선언이 터지니 이때 우리군의 몇 사람은 장래 조선민족이 독립운동을 하자면 아령과 남북만주를 중심삼지 아니하면 아니되리라하고 동지 이청천과 함께 협의하고 국경을 넘으려는데 당시 경계가 심할 때이라. 잘못하다가 잡힐 염려가 있으므로 6월 6일에 우리 두 사람은 군복을 벗고 보통양복을 갈아입은 후 자동차를 타고 수원을 갔었소.

그리하야 수원에서 차를 타고 그대로 남대문으로 오니 해가 지고 어둡디다. 그대로 신의주까지 와서 자는 데 밤중에 경찰의 조사가 있으므로 그 밤을 자지 못하고 처음에는 일인이라고 대답한 후 정거장에 가서 차를 타고 국경를 넘었습니다.

라고 하여, 이청천과 장래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만주와 러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일차적으로 만주로 망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수원, 남대문, 신의주를 거쳐 만주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망명은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3.1운동후 많은 한인청년들이 만주로 망명하는 도화선이 되었으며, 또한 이들은 체포시 현역군인이었으므로 군법회의를 통하여 사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명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한편 김경천과 이청천 등 일본군 현역 장교의 망명은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김경천과 이청천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으며, 이들의 체포에 현상금 5만엔을 내걸었던 것이다.

만주로 망명한 김경천은 일단 신의주 맞은 편 安東縣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 같다. 이 단체는 3·1운동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던 학생 趙在健, 咸錫殷, 吳學洙, 池仲振, 朴永祐 등이 만주로 피산하여 동년 4월 안동현 舊市街 豊順錢에 모여 조직한 독립운동단체로서 상해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하는 공화주의 지향의 단체로 당시 총재에 安秉瓚, 단장에 함석은, 간사에 박영우, 서기에는 張子一이 활동하고 있었다.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한 김경천은 이 단체의 주요 사업에 적극 호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그는 상해임시정부의 운동비 조달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또한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된 동지들의 후원을 위하여 노력하였을 것이다.

또한 김경천은 대한독립청년단 단원들과 함께 1919년 8월에는 안병찬 외 28명의 연서로 '中華民國 官商報 學界諸君에게 告함'이란 제목으로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 일본이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에 대하여도 침력을 전개할 것임을 강조하고, 만일 국제연맹에서 한국문제에 대해 만족할 할만 해결을 얻지 못하면 곧 독립전쟁을 선포하여 최후의 一人까지 혈전을 전개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김경천의 대한독립청년단에서의 활동도 동년 8월 총재인 안병찬의 체포로 인하여 세력이 약회되자 크게 위축되엇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김경천은 보다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김경천은 서간도 柳河縣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으로서 활동하였다. 이것은 독립운동계에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 무관학교에서 김경천은 이청천과 함께 독립군을 양성하며 시기를 엿보았다. 이 학교에는 구한국군관학교 출신인 申八均도 있었다. 이 세사람은 조국을 위해 투쟁할 것 맹세하고 그 맹세의 뜻으로 다같이 天字가 붙은 별호를 가지게 되었는데, 東天 申八均, 擎天 김광서, 청천 池錫奎라고 했으며, 이들을 南滿 三天이라고 하였다.

한편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하던 김경천에게는 군사서적이 필요하였다. 이에 서울 집에 많은 서적을 소장하고 있던 김경천은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한 여인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 여인은 김경천의 집을 감시하던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때 張吉相이 裵天澤을 시켜 5만원이란 거금을 군자금으로 보내왔는데 이 돈을 김경천, 이청천, 신동천 등 3인이 공동관리를 하면서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1920년 3월 1일을 기하여 국경지대인 慈城, 厚昌, 또는 惠山鎭 등 어느 한 곳을 점령해서 국내에 3·.1운동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정신적 자극을 주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신동천은 남만주 한인사회의 지원을 얻기 위해, 이청천은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기 위해 그리고 김경천은 노령으로 무기구입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각각 이동하였다.

한편 노령지역으로 이동하던 김경천은 우선 중간기착지로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北間島를 택하였다. 단신으로 북간도로 간 김경천은 그곳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지방파벌간의 갈등으로 그곳에 정착하지 못한 김경천은 노령지역으로 재차 이동하였다.

5.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항일투쟁--창해청년단, 수청고려의병대, 고려혁명군

1919년 말경 러시아로 이동한 김경천은 이 지역 한인독립운동의 근거지인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이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다. 즉 1919년 말부터 1920년초까지 당시 시베리아 지역은 급격한 정치적 변동기였다. 널리 퍼진 빨지산 운동 뿐만 아니라 혁명군의 동진과 콜차크군내의 반란의 결과 백위파 정권이 전복되었던 것이다. 혁명군은 도시를 하나씩 탈환해 갔다. 1919년 11월 중순 러시아 혁명세력이 꼴차크 백위파 정권을 붕괴시킨데 이어 1920년 1월 15일에는 이르꾸츠크를 장악하였던 것이다. 연해주에서도 상황은 급변하였다. 우수리스크에서는 백위파 수비대 사병들이 1920년 1월 26일 반란을 일으켰으며, 블라디보스톡에서는 1월 31일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그 결과 연해주 주정부와 군대의 실제 권력은 볼세비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미국, 영국, 프랑스는 시베리아에서 그들의 군대를 대피시키기로 결정하였으며, 일본군만이 지리적 근접을 주장하면서 그곳에 계속 주둔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한인사회에는 러시아 혁명세력과의 제휴설이 강하게 제기되고, 실제 러사아공산당에 가입하거나 한족공산당을 조직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1920년 3월 러시아 혁명부대와 한인부대가 아무르강 하구 북쪽에 위치한 니꼴라예프스크(니항)의 일본군과 민간인을 전멸시키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일본군은 이를 명분으로 삼아 1920년 4월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연해주 지역을 공격, 한인들을 다수 학살하였던 것이다. 특히 김경천이 있던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에 대하여 일제의 무차별 공격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이 사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가옥이 다수 파괴되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활동하던 김경천도 블라디보스톡에서 산림지대인 수청지역으로 이동하여 산림속에 일단 피신하였다. 김경천이 수청지역으로 이동한 것은 이곳이 산악지대로 유격전을 전개하기 좋은 곳이며, 실제 이곳은 연해주에서 빨지산의 가장 중요한 활동 근거지였다. 또한 동포들도 다수 거주하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이곳 수청은 과거 의병과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 철혈단 그리고 러시아혁명이후에는 한창걸 등을 중심으로 한 빨지산의 근거지로서 항일의식이 강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당시 수청지역도 역시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1920년 4월 6일 일본군이 습격이후 이곳 역시 일본군과 백위파 군대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일본군은 이곳에 헌병대를 설치하는 한편 친일조직인 거류민회도 조직하여 한인들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강백우, 한창걸, 박세르게이 등 수청지역 한인 지도자의 집을 수색하는 한편 학교 교사들까지도 체포 구타하였다. 한편 일본의 조정을 받는 중국계 마적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한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에 김경천은 곤궁에 처해있는 재러동포들을 구하기 위하여 의용군을 모집, 마적 소탕에 적극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동아일보 1922년 1월 23일자 {露領見聞記} [警天 金將軍]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경천은-필지주)노령 해삼에 입하여 1년간을 체제하였으나 역시 여의치 못한 중 일본이 출병하여 일본군이 과격파와 반과격파의 軍器를 전부 몰수하고 조선인을 포착할 때에 다행히 도망하여 노령 연해주 삼림지대인 조선인의 통칭 水淸이라는 산중에 잠거하여 있었는데 그때에 중국인 마적은 露人의 무기를 日兵이 전부 압수하였음을 아는 고로 無人境에 들어온 듯하여 농촌에 절대다수를 점한 조선인의 피해가 막대하였나이다.

그러나 우리 농민은 마적을 방어할 방략이 絶無하여 가산을 포기하고 안전지대로 이전하려다가 처자는 餓死하고 부모는 凍死하여 半狂半死한 촌민이 水淸에서 海參에 탈주하여 가옥에 居接할 여유가 없는 고로 정거장 貨車 중에서 생활하면서 시중에서 걸식하는 조선사람이 부지기수이었나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군대는 조선인의 독립단과 공산당을 박멸키 위하여 마적 괴수인 嘋山이란 놈을 니꼴니스크시(尼市)에 불러다놓고 각별 우대하여 가면서 마적에게 무기를 공급하여 조선인촌락을 습격케 하여 다대한 손해를 주도록 한 것은 公然한 비밀이라 노령에 있는 조선사람은 누구든지 아지 못하는 사람은 없나이다.

형편이 이러함으로 조선청년은 義勇軍을 조직하여 마적을 토벌하였으나 매양 불리한 때가 많이 있었나이다. 이때에 김장군은 각촌에 檄文을 致送하여 의용군을 모집하여 급속히 주야로 연습을 하여 마적토벌을 시작하였으나 처음에는 의용군에 不少한 死傷이 있어 노령의 수천의 조선인촌락이 噴火山上에 있는 것 같았나이다.

즉 김경천은 수청지역의 조선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직접 조선인 마을에 격문을 보내어 의용군을 모집, 훈련하여 마적에 대항하였으나 처음에는 의용군의 훈련부족 등의 원인으로 패하였다. 그러나 김경천은 이에 굴하지 않고 사력을 다하여 마적토벌을 전개하였으며, 매번 자기가 선봉이 되어 단신으로 적진에 돌격하여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소수의 의용군으로 다수의 마적을 물리쳤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김경천 자신을 통하여 직접 들어보기로 하자. 동아일보 1923년 7월 29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활동상황을 언급하고 있다. 즉,

그런데 일천구백이십년 삼월에 저 유명한 이항(尼港)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삼월 초사일에 각 처에 헤어져 있는 조선 군대와 적군(赤軍)이 연합하여 [이항]에 있는 일본군대와 백군(白軍)에게 총공격을 개시하였소. 이때 군세는 적군의 연합군은 이천여명이오. 우리 조선군사가 칠백여명인데 [소학령}에는 수천명의 백군과 일본군 팔백명이 주둔하였였소. 전후 두 시간 콩볶듯 싸우는데 이 싸움에 일본군이 이백여명이 죽고 적군속에는 [홍가리]군사가 많이 죽었으며, 우리 군사는 겨우 육칠인 전사자가 있을 뿐이었소. 이 싸움에 우리 조선군이 용맹스럽게 싸운 것은 세계 각국 군사의 경탄하는 대상이 되었었소.

그러나 그후 구당(白軍)이 일본군을 뒤에 업고 쳐들어 옴으로 우리 군사는 몇배나 되는 일본군과 싸우는 것은 무모이라. 그곳에서 수청지방으로 퇴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수청지방에는 마적 고산(告山)의 패가 횡행하여 인민이 살 수 없었소. 이때에 우리 군사와 마적사이에 충돌이 있었는데 우리는 탄환이 부족함으로 일시 퇴각하였더니 마적이 들어와서 조선사람의 집 사오십호를 일시에 불을 놓아 밤이 새도록 회광이 충전하고 연기가 산간에 가득한데 이것이 우리 인간의 생지옥인가 하는 생각이 있었소. 나는 이 광경을 보고 아무래도 마적을 토벌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 결심하고 이때에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지원병을 뽑는데 재일학교 교사 다니는 사람이 많이 지원하였였소. 이때에 마적 사백여명들은 일본사람이 파놓은 요새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별안간 공격을 시작하여 일제 사격하니 필경 놈들이 지탱하지 못하고 산산이 헤어지는데 필경 거의 다죽고 삼백여명 중에 겨우 육십명쯤 살아가고 몰살을 하였소. 그리고 그해 겨울에는 여러 가지 일로 아무일도 하지 못하였소

라고 하여 니항사건 이후 수청지역의 마적 소탕전에서 적극 활동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당시 일제는 마적을 이용하여 한인들을 괴롭힘으로써 그들을 파산시켜 농민들로 하여금 한인독립군과 러시아 赤軍에게 불만을 갖도록 유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에 러시아로 이동한 김경천은 처음에는 수청지역의 滄海靑年團(일명 창해소년단)에서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수청지역의 마적소탕에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당시 창해청년단은 본부를 수청의 大鳥吉密에 두었으며, 단장은 金圭冕, 참모장은 鄭在寬이었다. 그리고 수청을 3개구로 나누어 각구에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총 병력은 상비대가 102명이고, 예비대가 945명이었다. 그리고 鄭舜哲, 韓昌傑, 장지호, 황군애, 김명철, 백발백중 명포수 한명극 등이 활동하였다.

당시 창해청년단 명예 단장이었던 김규면은 그의 비망록에서 창해청년단의 활동 상황에 대하여,

다른 편으로 소작인 고려농촌들에는 마적(홍후적)들을 파견하여 농민촌락들을 략탈, 파멸케 하였다. 1920년 하반기부터 1921년 상반기까지는 연해주에서 고려인빨지산부대는 일본군의 침입과 마적부대의 활동을 방지하는 전투에서 번번히 승리하였다. 촌락을 불지르고 략탈하던 코산파마적 7백여명은 수청지방 우지미, 허포수동, 석탄광에서 창해소년단부대의 토벌에 소탕되였다. 허포수동 농촌에 출병하였던 일본군대는 마적부대가 패주하는 바름에 다른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창해소년단부대 사령장은 김경천, 참모장은 정재관, 명예단장은 김규면이었다.

라고 회고하여 김경천이 1921년 상반기까지 창해청년단의 사령장으로서 일본군의 침입과 마적의 활동을 퇴치하는데 전력을 기울였음을 밝히고 있으며, 마트베이 김 역시 그의 저서 {일제하 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에서,

그는 1920년 봄부터 노령지역의 한국인 청년들을 규합하여 그 지휘하에 60명이 넘는 조선이 빨지산 부대가 모양을 갖추었다. 부대는 수청구역의 중국인 반혁명도당과 싸웠다. 자신들의 숫적 우세를 이용하여 적은 김경천부대가 방어하는 다우지미 마을로 밀고 들어왔다. 조선인 빨찌산 부대는 강습을 견디다 못해 퇴각했다. 중국인 반혁명 도당은 약탈을 하고 농가를 불태운 후 자신의 근거지인 수청 광산으로 철수 했다. 그 당시 수청군에 근거를 둔 김경천, 한창걸, A.P.사바쯔끼의 삘지산부대는 수청군당 지하조직의 소집에 따라 중국인 반혁명 도당과 투쟁했다. 주변의 농민들도 빨지산을 도왔었다. 전반적인 세력으로 인해 도당들은 포위 섬멸되었다.

라고 하여 김경천이 수청을 중심으로 중국인 마적 토벌에 기여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결국 김경천은 1920년 수청지역에서의 마적퇴치활동으로 시베리아지역에서 그 명성을 크게 얻었고, "金將軍"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마적토벌에 성공한 김경천은 수청지역을 중심으로 軍政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러시아인 등도 통치 관활하였다. 그리하여 만일 중국인이나 러시아인도 관활구역을 벗어나 타지역으로 이동하고자 할 때에는 김경천의 증명서를 소지하여야만 하였다. 그래야만 창해청년단의 수비구역 밖을 출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재러동포들의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民政도 단행하였는데, 총책임은 鄭在寬이 담당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활동하다 러시아로 이동한 인물로 大東共報社 그리고 勸業會,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자방총회 등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한 인물이었다. 정재관은 김경천을 도와 민정책임자로서 매년 매호마다 10원씩 걷어들여 군자금으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식 교육을 전폐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둔전병제도도 실시하였다.

1921년 봄 연해주 수청군 인접지역인 올가군에서 300여명에 달하는 통합빨지산 부대가 조직되자 김경천이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수청의 아누치노(도비허)구역에 있는 백군 까벨부대와 전투를 전개하였다. 또한 까르뚜크 마을의 치열한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수청 다우지미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경천은 1921년 초 수청고려의병대에 초빙되어 군대의 총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19년말 1920년초에 연해주 우수리스크 인접지역인 추풍 재피거우에서 조직되어 추풍지역에서 활동하던 혈성단은 1920년 가을 일본군대의 공격이 예상되자 남쪽지방인 수청지역으로 이동하였다. 혈성단은 1920년 12월 경 단원들은 약 100명이었며, 대장은 姜國模, 중대장은 蔡英, 소대장은 李昌善, 참모는 金奎 등이었다. 단원들은 각자 소총 약간과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한국독립을 표방하고, 동지방 동포들로부터 아편을 징발하여 매각하고, 식량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혈성단의 중심인물인 채영이 趙孟善부대와 함께 이르끄쯔크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혈성단에서는 군대를 지도할 총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혈성단은 수청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고려노농군회와 연합하여 1921년 4월 경 민간 자치단체로서 연해주 한인총회를 조직하고 군사기관으로 수청고려의병대(이하 수청의병대로 약함)를 조직하고 일본육사출신으로 군사전문가인 김경천을 초빙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1927년 블라디보스톡에서 간행된 {십월혁명 십주년과 소베트고려민족}의 [수청고려의병대}에 잘 나타나 있다. 즉,

1920년 3월 이후로는 백파와 연합군의 반동이 너무 심하였음으로 부득히 수세를 지키고 있었다. 동연 10월경에 간도로부터 온 박경철, 리승조 등 5인(신민단군인)과 도비허로부터 온 한창걸, 리병수 등 8인과 수청서는 강백우(지방단위원) 등 몇 사람이 수주허 흔든거우에 모여 고려노농군회를 조직하였다. 당시 간부임원은 회장 박경철, 군무 한창걸, 재무 리승조, 민사 강백우, 교육 강호여, 선전 우시하 등이었다. 1921년 4월 경에 혈성단 대표 강국모 등 몇사람으로부터 두 단체의 연합과 사관양성문제를 협의한 결과 수청에 있는 김경천동무를 청하여 군무를 맡기기로 하고 사관을 양성할 지점을 뜨레치푸진으로 정하고 회명을 연해주 한인총회라 고치었다.

이에 이르러 이상 각단체가 합하여 수청고려의병대라는 단일한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혈성단원이었던 박청림은 당시 김경천과 그의 활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김경천이 우리의 새 지휘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서울서 태어났다. 빈천하게 된 한 양반가문출신이다. 1910년 한일합방후 일본에 건너가 돈벌이를 하다가 일본 사관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 그후 일본군 장교로 군무한 사람이다.

3·1운동이 실패한 후 김경천은 동조자 이청천, 유동천, 기타 젊은 장교들을 데리고 만주로 탈출했다. 거기에서 동조자 2명은 현지 유격대에 입대했고 자기는 두만강을 건너 수찬강 하구에 와 동포들의 협력을 받아 다우지미촌에 오게 되었다. 현지에서 그는 유격대 훈련관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채영이 이르끄쯔크로 떠난 후 그는 이철남의 소개로 우리의 새 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때가 1921년 초였다.

즉, 김경천은 뜨레치푸진에서 사관 속성과를 만들어 군사들을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대원들의 전투훈련에도 정열을 다하였다. 특히 그는 추위가 너무 심해 훈련이 불가능할 때에도 병사집합실에서 군사학을 가르쳤다. 그러한 과정에 김경천과 혈성단의 지도자인 강국모사이에 주도권싸움이 벌어지게 되었으며, 그 와중에서 이르꾸즈크에서 파견나온 손풍익이 단총에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수청의병대의 지도자가 된 김경천은 계속해서 수청지역의 마적 퇴치에 노력하였다. 즉, 동아일보 1923년 7월 29일자에,

우리 군대는 일본군 때문에 나오지도 못하고 산중에 주둔하여 교전하였는데 그러노라니 그 고생이란 형언할 수 없었소. 그 추운 곳에서 겨울에도 신발을 못얻어신었으며, 여름에는 동복을 그대로 입고 지내다가 적군(赤軍) 사령관에게 의복을 좀 얻어 입고 이십일년 여름에 각처 수비대가 그 지방에 횡행하는 마적을 소탕하니 아령에 있는 우리 동포가 십여년간 마적에게 빼앗긴 재산이 수십민원이오. 생명이 많이 죽어 마적은 그 지방의 공동대적이 되었으므로 먼저 그 지방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하기 위하여 십여년의 화근이 된 마작을 소탕한 것이오.

라고 있듯이 수청의병대는 1921년 여름 러시아 적군 사령관의 도움으로 의복을 지원 받고 수청지역에서 횡행하는 마적들을 소탕하는데 전력을 기울렸다.

한편 1921년 5월 일본의 지원에 의하여 백위파가 연해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게 되자, 1921년 8월 수청의병대는 연해주에 있는 적군과 무장연합을 추진하였다. 당시 러시아 적군과 한인독립군간에 공동의 적은 일본군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수청의병대에서는 부대장 이철남을 아누치노로 파견하여 연해주 무력혁명위원회 위원장 월스키와 부위원장 룹쪼브를 만나 무장부대 연합회담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상호간에 연합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 회담의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김경천은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고 박청림은 회고하고 있다.

이국땅에서 우리의 철천지 원수 일본군을 공격하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 우리들의 목적입니다. 일본군은 조선을 강점한 것처럼 러시아의 광활한 극동지역을 점유할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러시아형제들과 합세하여 10만명의 사무라이대군을 격멸해야 합니다. 합심이 승리의 담보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김경천의 연설에서 알 수 있듯이 김경천의 목적은 일본군을 공격하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1921년 8월 수청의병대는 러시아 참모부의 지령에 따라 모두 도비허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김경천은 1921년 9월 러시아 유격대 셉첸꼬 부대의 제안에 따라 의병대의 일부를 올가항에 보내는 한편 나머지 대원들은 김경천의 지휘하에 아누치노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김경천부대는 동포들의 요구에 따라 마적들을 방비하기 위하여 수청의 뜨레치푸진과 수주허에 주둔하였다.

1921년 10월 김경천부대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수청에 주둔한 백군을 공격하여 수청 신영동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패하여 일본군과 백군의 추격을 받게되자 김경천은 기병을 데리고 이만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피눈물나는 이만으로의 이동상황을 동아일보 1923년 7월 29일자에서 김경천은,

이때 우리는 적군과 행동을 같이 하였으므로 백군이 조선군이라고 만나기만 하면 죽일 때이오. 이때 연해주에 적군이 전멸함에 다시 붸기어 돌아가는데 강낸이죽을 먹어가며 겨울에 박착을 하고 [이만]강가으로 이백리를 행군하여 가쏘. 그래서 필경 어떤 산에 가서 얼음과 눈으로 요새를 만들고 지키고 있으니 만일 이때 일본군이나 백군이 들이치면 배산일전하려 하였소.

라고 하여 그 처절함을 언급하고 있다.

한편 당시 이만에는 李鏞이 이끄는 韓國義勇軍이 러시아 적군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고 백군 소탕작전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김경천 역시 이들과 만남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김경천은 이만에서 일찍이 혈성단에서 활동했던 채영과 창해청년단에서 함께 활동한 김규면과 정재관 등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김경천이 한국의용군에서 활동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것이다. 이때 한국의용군의 주요 간부로는 김규면, 馬龍河, 金德殷, 박 일리아, 朴春日, 朴英 등을 들 수 있다.

이만에서 활동한 김경천은 이만의 서방 약 20리 지점에 근거지를 두고 단원 1,000을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각자 소총과 탄약 350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단장 겸 무기국장은 姜國模, 중대장 蔡永, 소대장 李學雲, 朴昌訓, 金澤鎭, 李洪植, 辛恭用, 李昌善 등이었고, 외교부장은 韓一齋, 총무부장 金學俊, 통신부장 金春洪, 위생국장 李正洙 등이었다.

한편 러시아 백위파는 1921년 12월 하바로브스크를 점령하는 등 연해주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였고 이에 백위파와 러시아 혁명군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김경천 부대는 1922년 정월 이만에서 백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당시 이만에서의 전투상황을 동아일보 1923년 7월 29일자에서,

그 이듬해(1922년--필자주) 정월에 백군이 [이만]땅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적군이 모두 나오나보다 하고 다시 행군을 하여 나오다가 [하바로프스크]에서 홍백전쟁이 있었는데 그 전쟁 중에 나는 백군의 중간 연락을 끊기 위하여 [이만]에 있는 백군 총공격을 시작하니 그때는 정월 어떤 날이라. 제1차로 백군이 수백명 죽고 대략 여섯시간 동안 격렬히 싸우는데 백군은 대포를 걸고 내리다질러서 탄환이 우박 쏟아지듯 하였소.(중략)

이때 적군의 사령관이 백군에게 항복하야 그리 빼가서 붙었음으로 적군의 일부를 내가 지휘하야 싸우게 되었는데 이 때 나는 악에 바친 사람이라. 탄환이 비쏟아지듯 하는 속에 말을 타고 서서 지휘하는데 백군들이 대포를 놓다가 번-한 불빛에 나를 보고 [꺼레이츠]란 소리를 지르고 달아나는 자가 있었소. 이리하야 이만은 완전히 점령하였으니 이때는 적군의 힘이 약할 때이라. 약 이백여명의 우리군사로 백군 칠백여명이 지키는 곳을 점령하기는 하였으나 배후에는 일본군사가 있는 터이라. 오래 지킬 수 없어 다시 퇴각하였소.

라고 하여 김경천은 러시아 백군과 적군이 하바로브스크에서 전투하는 틈을 타 이만에 있는 백군을 공격하여 이만과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백군간의 연락을 두절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적군의 사령관이 백군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김경천은 말을 타고 비오는듯한 포탄을 무릅쓰고 수청의병대와 더불어 러시아 적군도 함께 지휘하여 이만을 점령하였던 것이다. 즉 김경천의 지휘아래 200여명의 군사로서 백군 칠백명이 지키는 이만을 점령한 것은 러시아지역에서 전개된 한인 민족운동사상 큰 업적이라고 할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경천은 숫적 열세와 배후에 일본군이 있었으므로 이만에서 전략상 퇴각하고 말았다. 당시 이 전투에 참여했던 최호림은 이만부근전투에 대해 아래와 같이 회고하고 있다.

우리 부대가 이만 근처에 당도하자 김경천부대장이 이만시 공격직전을 구상했다. 그러자 뽈라꼬브기마대장과 빨진대대장이 그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1922년 1월 5일 우리는 하루 종일 행군하여 그날 저녁 늦어서야 루끼야놉까에 와 그곳에서 숙소를 정했다. 이튿날 이른 새벽 우리 유격대는 이만시 근교에 당도하여 께드롭까강을 도하해 도시에 바싹 접근했다. 그러나 기습공격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밀정을 통해 우리 유격대의 이만 쪽으로의 이동에 대한 정보를 받고 방어시설을 튼튼히 갖추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까닭에 다른 전술을 적용해야만 했다. 그러던 차 꼬와료브중장이 그만 전사하였다. 우리는 그 즉시로 200명의 기마대를 두어 양쪽 측면에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적군이 노출된 평지에 나타나자 김경천부대가 기관총 교차사격을 시작했다. 아군 기마병들의 장검이 햇빛에 번쩍이었다. 적군의 기세가 수그러지기 시작하자 우리 보병과 기마병들이 도시로 돌진하여 우체국, 전신국, 철도역을 점유했다. 이만시 수비대를 격멸하고 숱한 군수품, 무기를 노획했다. 이 전투에서 우리 유격대원 12명이 전사했고 13명이 부상했다.

이어 김경천은 1922년 3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약골리가를 공격하였다. 이에 러시아 백군은 우수리스크 쪽으로 붸겨났다. 이어 백군이 한반도쪽으로 퇴각할 듯보이자 김경천은 이들을 추격하기 위하여 일본군의 경계선을 뚫고 추풍지역으로 돌격하였다. 김경천은 당시의 상황을 동아일보 1923년 7월 29일자에서 " 이것은 범의 허리를 밟고 지나가는 듯한 장쾌한 모험이었소"라고 하고 이어 당시의 상황을 " 불빛에 뻔히 비치는 일본 보초병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흰말을 포장으로 덮어서 데리고 강을 건너는데 강에 배가 없어서 어찌할 수 없었소. 마침 19세먹은 소년 기병 1인이 자원하고 강위에 가로 질린 철사에 매어 달리어 십여간 이나 되는 강을 건너가서 배를 가지고 와서 전 군대를 건너게 하니 이 때 발각만 되면 몰살이라. 더욱 소년을 구사일생의 경우에보내고 매우 염려되었었소. 건너간 후 그날 밤으로 [취풍] 우리 독립군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소"라고 하여 추풍에 도착상황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김경천이 이처럼 승리를 거두게 되자 1922년 7월 연해주의 혁명군사위원회는 김경천을 뽀시에트 군사구역 조선 빨지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정치위원으로는 시시낀, 참모장으로는 스탄꼬브가 임명됐다.

한편 1922년 여름 이후 일본군의 철병이 임박해지자 독립운동단체들은 앞으로의 향후 대책을 위하여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고 지휘체계를 재정비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김경천이 활동하고 있던 부대인 수청의병대도 1922년 8월 경 한족공산당과 병합해서 대한혁명단이라고 개칭하고 니코리스크 서방 7리지점에 본부를 두었다. 그리고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단원들에게 러시아식 교련을 시켰다. 단원은 약 500명 정도로 전부 무장을 하였고 마필은 80두였다. 김경천은 사령관으로 활동하였으며, 대대장은 崔峻衡(구한국시대 육군 伍長), 중대장은 강필립, 金權世, 徐一世 등이었고, 참모장은 高官範, 참모는 張善祐, 黃昌箕 등이었다. 김경천은 아편추출을 통하여 단비를 마련하였으며, 장정의 교육을 위하여 러시아육군사관 5명을 고빙해서 1개월에 50원씩 급여를 주며 교편을 맡게 하기도 하였다. 또한 무관학교를 설립해서 300명의 생도를 수용할 계획을 갖고 추진하였으며, 교장은 구한국시대 육군 曹長 출신인 任度準이 담당하였다. 그리고 생도는 14세부터 18세까지 청년으로서 대한혁명단의 자제로부터 선발하였다. 교육연한은 2년이었다.

한편 1922년 9월 경 김경천은 그의 지휘하에 적군의 몇몇 부대와 더불어 니꼴스크-우수리스크에서 뽀시에트를 거쳐 두만강 하구에 이르는 전투원정에 참가하였다. 이때 뽀시에트로 이동 중 김경천은 상부 시지미촌에서 백군 패잔병들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수청의병대는 김경천의 지휘아래 기마공격을 강행하였다. 그 결과 김경천 부대가 승리하였다. 그런데 김경천이 부하 몇 명을 데리고 전쟁이 벌어졌던 곳을 시찰할 때 부상한 백군 장교가 그를 쏴 버렸다. 그런데 다행히도 총알은 그가 탄 군마를 쓰러 눕혔다. 말이 갑자기 넘어지자 부대장이 말 밑에 깔리게 되었다. 그의 동지들이 뛰어 와 그를 겨우 말 밑에서 끌어냈으나 왼쪽 다리가 골절돼 있었다. 김경천은 이 부상으로 수청계곡의 다우지미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1922년 러시아와 중국국경지방에 있는 단체는 각 단의 통일을 도모하는 동시에 장정의 모집과 무기의 수집에 힘써 1922년 10월 일본군의 철퇴가 완료되기 직전에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였다. 고려혁명군 총재는 李仲執이며 소재지는 秋風이고, 고려혁명군 동부사령관을 김경천이 담당하였으며, 본부는 그의 근거지인 수청에 두었다. 그리고 총사령관은 金奎植, 서부사령관은 申禹汝, 남부사령관은 林炳極, 북부사령관은 李錐 등이었다.

6. 러시아 내전 종결이후의 김경천의 향배

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1922년 12월 말, <조선인 유격연합대 해산 및 국민전쟁 참가자 귀가>에 대한 우보레비츠 총사령의 명령이 내렸다. 적군은 지금까지의 동맹군인 한인독립군에 대해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그것은 시베리아 지역에서 신생 소비에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러시아 내전 이후 러시아 적군의 후원을 얻어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려 했던 김경천은 실의에 빠졌다. 이러한 때에 上海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모두 모여 재기를 모색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에 김경천은 1923년 2월 상해에 가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는 김경천의 마음에 흡족하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1923년 4월경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다시 돌아와서 구로지코 부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려고 계획하였으며, 사관생도의 교재용으로 일본 육사의 교과서와 典範令을 번역한 것을 사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1924년 3월에는 한족군인구락부를 조직하여 본부를 블라디보스톡에 그리고 지부는 니콜스크에 두는 등, 자못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활동도 러시아당국의 대한인정책과 노령출신 2세들과의 갈등으로 점점 쇠퇴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김경천은 1926년 블라디보스톡에서 尹海, 金奎植 등과 함께 민족당 주비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김경천은 그 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군사학과 일본어를 가르쳤다. 그후 김경천은 한소국경지대에서 국경경비대에서 고급장교로서 일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경천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한 한인들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를 앞두고 간첩죄로 체포되어 1936년 9월 29일 원동지방 국경수비대 군법회의에서 소련형법 제58조 12조에 따라 3년형을 받고 받았다. 그리고 2년반의 형을 복역한 후 1939년 2월 4일 일단 카르라가에서 석방된 그는 1939년 봄 가족을 찾아 카자흐공화국 카라간다주 텔만스키 구역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코민테른 집단농장에서 채소작업원으로 1달여동안 일하였다. 그러던 중 1939년 4월 인민의 적이라는 혐의로 러시아편에 섰던 한인들에 의하여 다시 체포된 후 동년 12월 17일자로 간첩죄로 유죄판결을 받아 교정강제노동수용소 8년 금고형을 선고받고 카라간다에 있는 교정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복역하였다. 이때만 하여도 김경천은 그이 부인과 유정화와 편지 왕래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편지에서 김경천은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다만 독일과의 전쟁 발발 가능성 때문에 실수가 있어 체포된 것 같다고 희망적인 소식을 전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한 다음에는 김경천은 시베리아로 이감되었으며, 편지 왕래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 후 김경천은 1942년 1월 2일 소련의 북동쪽 끝 꼬미자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으로 유배가서 아르항겔스코에주 금고지에서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스탈린이 지배하던 시기라 정확한 사망일시나 장소, 사망원인 등은 알 수 없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인 1959년 2월 16일 김경천은 모스크바 軍管區 군법회의에서 심리되어져 동년 2월 19일 사후에 복권되었다.

7. 餘言--김경천과 그의 가족 이야기

김경천의 당시 망명상황은 그의 후손들이 기록한 {김경천에 대한 회고}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여름날, 할아버지 김경천은 일본인들이 자신을 미행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부인에게 여행가방과 준비물을 마련해달라고 정중히 부탁하였다. 그리고 누가물으면 금강산에 사냥갔으며, 3일후 저녁 8시경에 돌아온다고 전해달라고 당부하였다.

그 다음날 남편이 출발후 한복을 입은 일본인 2명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남편이 언제돌아오는가 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년는 남편의 말대로 대답하였다. 그 후 정확히 3일후 일본인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즉 김경천은 그의 부인에게 금강산에 사냥갔다고 말하도록 한 뒤 만주로 망명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3일후에 돌아온다고 함으로써 3일간의 시간을 통하여 무사히 국내를 탈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김경천이 망명한 후 일본 군경은 김경천의 가택을 수색하였다. 그리고 그이 부인 유정화를 체포하여 그녀에게 심한 고문을 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편의 행방에 대하여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리어 감금된지 1주일 후에 단식을 단행하였다. 이에 일본인들을 당혹하게 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을 {김경천에 대한 회고}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정확히 3일후 일본인들이 끊임없이 집으로 찾아왔었다. 집에는 수색이 시작되었다. 집에는 금빛 휘장등을 단 군복차림의 친척들 사진이 있는 두꺼운 앨범이 있었다. 그 모두를 일본인들이 빼았아 갔다. 할머니 유정화는 수색이 있던 바보 그날 체포되었다. 그리고 자녀들은 집의 별채에 모두 강금되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심문이 계속되었다.

할머니 유정화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나는 당시 젊었었고, 남편을 위해 모든 일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남편이 체포되지 않기를 바랬을 뿐, 자식들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고백하였다.

할머니는 강금된지 1주일 후 단식을 선언하였다. 그녀는 단식기간 동안 3일간이 힘들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녀가 단식에 돌입하자 일본인들은 청어를 그녀에게 갖다되어 단식을 금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레도 그녀가 굴하지 않자 일본인들은 그녀에게 자식을 생각하여야 한다는 둥 그녀를 계속 설득하였다.

결국 그녀가 죽을 것을 염려한 일본인들은 그녀를 석방하였던 것이다.

한편 김경천이 1923년 자신을 시베리아로 찾아온 동아일보기자에게 전한 시 한수는 다음과 같다.

1. 뜬 구름도 방황하는 시베리아 벌

칼을 짚고 홀로 서서

흰 뫼 저편을 바라보니

사랑하던 00화는 희미하고

2. 00에 목마른 사람이

이천만 아처롭다

뜻을 열 곳이 없으므로

흑룡수에 눈물뿌려

다시 맹세하노라

김경천의 독립에 대한 애절한 정을 느낄 수 있는 시이다.

한편 1919년 6월 김경천이 만주로 망명한 후 일본은 김경천의 집을 계속 감시하였다. 김경천이 혹시 나타날까 해서 였다. 그 와중에 김경천의 가족이 겪었을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엇울 것이다. 서울에 남아 있었던 김경천의 부인인 유정화는 그녀의 세딸 지리, 지혜, 지란을 데리고 집안을 포위 감시하고 있던 일본의 감시를 벗어나 밀항선을 타고 극동 블라디보스독에 도착하여 이곳 저곳 전투지를 따라다니며 고생하였다. 1925년 6월 중순 유정화의 러시아로의 이동 상황을 후손들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머니의 아버지 김경천은 오래 전에 러시아에 있었다. 그의 아내, 나의 할머니 유정화는 자기 딸과 함께 빨치산 통신선을 통해 은밀히, 어머니의 말씀처럼 남편과 만나기 위해 그먼 러시아로 어린 딸들과 함께 몰래 준비하였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어머니 유정화가 그녀가 이제어른이 되었을 때, 이야기하여 준 것들이었다.

먼길 채비가 끝나자 그녀는 조금이나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세간 집기, 물건들을 은밀히 팔아 치워야 했다. 이런 일들을 일본인들이 알라차리지 못하게 매우 은밀히 진행해야만 했다. 그래서 밤에 빨치산의 통신선을 통하여 이마을에서 저마을로 이동하여 러시아 국경까지 이동하여 갔다.(중략) 어느 밤중에 수행한 고기잡는 한국인 노인 2명과 함께 할머니와 딸들이 강에 도달하여 고기보관하는 고기잡이 배의 선창에 몸을 숨겨야 했다. 노인들이 강변으로부터 노로 배를 떠말어 냈을 때, 험한 강변 언덕에서 일본말로 누구냐 서라 라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을 총을 쏘고, 이른바 순풍이었다. 큰 강에서의 바람은 정말 순풍이었고, 고기잡이 배는 러시아국경에 도착하였으며, 어머니가 기억하시는 바에 의하면 애들이 선청에서 몸을 밖으로 들어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한국인 노인들은 할머니께 "절대로 선창에서 몸을 내밀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눈 큰 사람들이 잡아갑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처럼 러시아인을 뜻하는 것이다.

고기잡이 배는 할머니 유정화가 사전에 빨치산 통신선을 통하여 갖추어 놓았던 필요증면서를 제출하였던 강변 국경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하여 용감한 여인 유정화는 러시아말 한마디도 모르면서 어린 딸과 함께 러시아에 있게 된 것이다.

김경천의 가족상황을 보면, 부인과의 사이에 2남 4녀를 두었다. 첫째 智利(1915-1982, 일본 千葉縣 千葉郡출생), 둘째 智慧(1917-1936, 일본 千葉縣 千葉郡출생), 셋째, 智蘭(1919-1995, 서울 사직동 166번지 출생), 넷째, 김수범(1926-1995, 블라디보스톡 출생), 다섯째, 김지희(1928-생존, 수청 다우지미 출생, 카자흐스탄 카라간다 거주), 여섯째, 김기범(1932-생존, 하바로브스크 출생, 러시아 노브고로드시 거주) 등이다. 이 가운데 둘째 딸 지혜는 불리디보스톡에서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그리고 손자녀 6명을 두고 있는데, 김지리(러시아명 베라)의 아들은 이브게니(1942-), 아나톨리(1949-1997), 겐나지(1946-), 딸 리지야(1944-), 류두밀라(1950-) 등이며, 지란은 러시아명은 니나이며, 아들은 알베르트이다(1937-). 수범은 러시아에서 출생하였으며, 러시아명은 발로쟈이다. 그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 알렉산드르(1956-)는 독일에 거주하고 있으며, 둘째는 가리(1961-)이며, 딸은 나탈릴야(1951-)이다. 지희의 러시아이름은 지나이며, 딸은 나탈리야(1951-)이고, 아들은 발레리(1956-)이다. 아들인 기범은 러시아이름은 겐나지이며, 딸이 2명인데 첫딸은 알료나(1961-)이고, 둘째는 갈리나(1963-)로 모두 모스크바에 살고 있다.

한편 김경천의 가족이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한 이후에 김경천의 처남 유대진 역시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그는 일찍이 김경천이 만주로 망명한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김경천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역시 러시아로 돌리게 되었다. 그 역시 러시아지역에서 김경천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1923년 이후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신문사 기자로 일하였다.

한편 유대진은 기선을 타고 활동 중 기선에 달려 있던 기중기의 갈고리가 떨어져 머리를 다쳐 두통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유대진의 근황은 1937년 이후 소식을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1936년경 스탈린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된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1936년 김경천이 인민의 적으로 체포된 이후 그이 가족은 큰 고난을 겪었다. 김경천의 아들 김기범의 딸인 갈리나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939년 일본군의 스파이 혐의로 인민의 적이 되어버려 소련땅에서도 저희 가족은 엄청난 사회적 박해를 받았으며, 심지어 저의 부친은 군인이 돠고자 하였으나 인민의 적이라는 이유로 군사학교에 가지 못하고 勞務隊에서 근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인민의 적의 소지품, 사진 등모든 물품은 KGB가 압수해 갔다고 들었습니다. (중략)

김경천의 가족은 1937년 블라디보스톡에서 강제이주 당하여 카자흐스탄 카라간다주 텔만스키구역에 정착하였다. 이곳은 원래 독일인들이 거주하였던 곳이나 조선인들이 옮겨옴으로서 독일인들읜 다른 곳으로 이주당하였다. 이곳은 당시 러시아인외에는 다른 민족은 별로 살지 않은 것이었다고 한다.

김경천의 부인 유정화는 이곳 제3국영농장에서 말린 쇠똥으로 난로에 불을 지피는 작업 등 힘든 노동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1939년 봄 김경천이 돌아온 이후에 그는 부인에게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쉬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경천이 다시 체포된후 유정화 등 가족들은 다시 생활고와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마침 국영농장의 책임자가 김경천의 가족을 잘 돌봐주어 유정화는 목탕에서 불을 때거나 온실에서 일하는 등 비교적 가벼운 노동을 하도록 알선해 주엇다고 한다.

이곳에서 살던 김경천 가족은 1941년 봄 카라칸다시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그곳에는 큰 딸인 지리의 가족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지리의 남편은 김뽀뜨르였으며, 그의 안내로 김경천 가족은 이곳에 정착하였다. 처음에 이곳에는 조선인들이 별로 없었으나 1941년 여름 이후 독소전쟁으로 한인 노무부대들이 탄광이 많은 이 지역으로 다수 이동하여 조선인들이 숫자가 늘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List of Articles
번호 카테고리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2 기타 독립운동 관련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3집 간행과 <전우>논문 발표 file 박환 2015.09.07 29
31 기타 독립운동 관련 필동 임면수의 독립운동 file 박환 2014.02.24 678
30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성명회 취지서, 이범윤, 유인석, 홍범도, 한글 원본자료 및 사진 자료 최초 공개 박환 2010.08.31 6845
29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최재형 연구-崔才亨과 재러한인사회-1905년 이전을 중심으로 박환 2010.08.31 5897
28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김경천 장군 연구-2. 김경천에 대한 부인과 자녀들의 회고 박환 2010.08.31 5725
»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김경천 장군 연구-1. 시베리아 항일 영웅 김경천 장군 연구 박환 2010.08.31 5907
26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대한인 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8. 대한인 정교보의 내용 박환 2010.08.31 5445
25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대한인 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7. 대한인 정교보사의 구성 박환 2010.08.31 5930
24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대한인 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6. 대한인 정교보의 간행 박환 2010.08.31 5639
23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대한인 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5.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 총회의 재정 박환 2010.08.31 4978
22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대한인 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5.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 총회의 재정 박환 2010.08.31 5117
21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대한인 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4.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 총회의 활동 박환 2010.08.31 5414
20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대한인 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3.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 총회의 성립 박환 2010.08.31 5119
19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대한인 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2.국민회 원동지회 박환 2010.08.31 5074
18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대한인 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1. 공립협회 박환 2010.08.31 5388
17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권업회-4.재러한인의 계몽과 민족의식의 고취 박환 2010.08.31 5026
16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권업회-3.권업신문의 간행과 내용 박환 2010.08.31 5032
15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권업회-2. 권업회의 활동과 재정 박환 2010.08.31 4962
14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권업회-1장 권업회의 조직과 활동 박환 2010.08.31 5152
13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대동공보-일제의 조선강점과 대동공보의 폐간 박환 2010.06.18 5407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