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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보의 내용은 발행 연도에 따라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호부터 8호까지(1912. 1-1914.2)와 9호부터 11호까지(1914.3-1914.6)이다. 전자는 대체로 논설, 교회소식, 잡보, 광고, 본국통신, 세계소문, 교회학술 등 러시아정교와 관련된 내용을 항일운동과 관련된 것보다 많이 싣고 있다. 이에 반하여 후자는 동정교회, 교회통신 등 교회관련기사 외에 우리의 주장, 새지식, 바른 소리, 우리글, 우리시 등의 난을 새롭게 마련하여 우리 민족의 주장을 보다 강력하게 반영하고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1914년에 간행된 9호에 실린 <편집인이 독자에게>에,

1. 한호마다 조금이라도 잘하여 가도록 힘쓰오리다.

2. 새로 고명한 기자 한분을 모셔올 터이니 쇳소리나는 글과 진주같은 사상을 접

하는 날이 멀지 아니하오리이다.

3. 다음호에는 아름답고 간절한 서간도 동포의 사정과 수십년래로 조국을 위하여

몸을 바치신 열혈지사의 역사가 호마다 하나씩과 밤낮에 그립고 듣고 싶은 본

국소문과 알아둘 만한 세계소문과 보는 자의 가슴을 울리는 듯한 바른 소리와

우리민족의 앞길을 지도할 힘있고 정성있고,긴급한 우리주장 등 진실로 글자

마다 피방울이 흐르고 글귀마다 쇳소리기 날 것이외다.

라고 한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전제 하에 정교보의 내용을 주제별로 살펴보자.

우선 정교보에는 정교신앙을 강조하는 내용을 다수 싣고 있다. 창간호에 실린 <정교론>에서는 문명한 인간, 문명한 집안, 문명한 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교를 신앙해야 한다고 하고, 또한 창간호의 논설 <우리한국 사鿑은 급히 정교회에 도라올지어다>에서 우리동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급히 정교를 신앙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정교보에서는 지금까지 정교를 믿는 재러한인들 가운데에는 진심으로 믿기 보다는 여러가지 편리를 위하여 믿는 경우가 많다고 전제하고 진심으로 정교를 믿고 따를 것을 주장하였다. 즉 창간호 <정교셰례밧은 쟈에게 고폑>에,

본인이 어떤 동포를 대하여 성경을 열람하면서 하나님의 참이치와 예수그리스도의 오묘한 말씀을 설명하고 믿기를 권면하니 그 동포가 말하기를 그대가 말씀한 천주학 장이라 믿기는 고사하고 듣기도 싫으니 어서 거더치우라하거늘 본인이 다시 묻기를 그대가 아라사 절당에 세례를 받지 아니하였는가. 그 동포가 대답하기를 나는 세례가 무슨 명사인지 자세히 알 수 없거니와 이왕 아라사 절당에서 크리시체 ゛세례ゝ 하고 미드리깨를 받았노라. 본인이 묻기를 그 미드리깨는 무슨 소용으로 받았는가. 그 동포가 대답하기를 다른 이유 아니오. 다만 세가지 필요한 일이 있으니 첫째에는 빙표대신 미드리깨를 가지고 각처에 내왕하기 편리함을 위함이오, 둘째에는 아라사람 양부를 얻어 도움 받기를 위함이오, 세째는 미드리깨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두터히 대접하니 그 대접받기를 위함이로다.

라고 있듯이, 당시 재러 당시 재러동포들이 내왕의 편리, 재정상의 이익, 후한 대접 등 자신들의 생활상 편리를 위하여 세례를 받고 세례증명서를 받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세례를 받은 후 한국인들은 교회에 나가기는 커녕 한국 고유의 한식과 추석에 상공당, 국수당 등에 가서 즐기며, 놀기만 하는 것을 비판하고 신도로서 하나님의 이치를 전파하고, 타인의 모범이 되어야 하며, 국가와 동포를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5호 논설 <아령에 잇鏅 한인은 졍교로 통일폑이 필요폑>에 보이듯이 러시아지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정교로 통일할 것을 주창하였다.

정교보에서는 재러한인들에게 정교 신앙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교리를 게재하기도 하였다. 즉 <교회학술>란을 통하여 <<동정교종감>>, <<성사요략>>, <<自暗進明>>, <<世界光明>> 등을 싣고 아울러 <교회소식>란을 통하여 러시아 지역 교회의 한인의 전도 상황 등을 소개하였다. 한편 재러한인들의 정교신앙 현황에 대하여도 밝히고 있다. 창간호에 실린 <아령한인 정교회의 근상>이 그것이다. 여기에서는 1910년 이전의 상황에 대하여, 러시아 정교가 한인들에 전파된 이래 한인의 신도가 수만명이며, 한인 전용 교회만도 9곳이나 된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교를 믿음으로서 한국인들은 구습을 벗고 문명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교보는 시베리아총회의 기관지였으므로 항일과 관련된 기사를 많이 싣고 있다. 정교보 2호 본국통신 <하나님이 무섭지 아니한가>에서는 105인사건에 대하여, 왜인들이 교인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하여 무죄한 교인을 암살음모니, 연루자니 하고 잡아가두니 어찌 하늘이 무섭지 아니한가라고 비판하고 이어 같은 호 본국통신 <죽이면 거저 다죽이지>에서는,

일본 헌병과 군사들이 의병을 폭도라 강도라 칭하고 잡아 죽일 때에 혹 냉수를 억지로 많이 먹이고 반듯이 잡아 뉘인 후에 복부에 널쪽을 놓고 올라뛰기를 여러번 하며 먹은 냉수가 도로 나올 때에 목에 걸니어 호흡을 통치 못하게 하여 죽이며, 혹 구덩이를 파고 사람을 그 구덩이 속에 들이 세우고 절반 남아 산장하여 그 사람이 서서이 죽게 되면 목을 잘라 죽이며, 혹 나무에 목을 다라멘 후에 한쪽 팔과 다리를 잘라 죽이며, 혹 모래판에 얼굴만 내어 놓고 산장하여 죽이며, 또 도처에 부녀를 겁탈하다가 순종치 않으면 찻든 군도로 항문에서부터 입까지 올니째여 죽이며

라고 하여 일본이 의병과 일반 부녀자들을 어떻게 참혹하게 죽였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또한 4호 본국통신 <럡독졔군의게 대폁야>에서도,

저 교활하고 악독한 왜인의 정책은 날로 심하여 우리의 삼천리 산하로써 이천만 가두는 감옥을 삼으니 슬프고 가련하다. 내지 형제의 참상이여. 어제가 태평셰계요 아침이 옛날이라. 눈만 금쩍하여도 잡아다 가두며, 사형에 선고하여 무리한 형벌과 원통한 죽엄에 숨도 한번 크게 쉬지 못하고 다만 묵묵히 생각하며 은근히 발하는 바는 해외로 나아온 우리라.

라고 하여 우리 삼천리 산하로써 이천만 가두는 감옥으로 삼았다고 일제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6호에 양목생이 기서한 <내지형편, 현행 악형의 종류>에서는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에게 행하는 악행을 소상히 기록하여 일제의 악행을 15가지로 나누어 소상히 기록하여 고발하고 있다. 죽침을 길게 깍아 신구멍 찌르기, 추운 겨울에 벌거벗겨 사다리에 꺼꾸로 달아매고 어름물 끼언기 등 15개 악행을 행하고 있다고 폭로하였다.

또한 정교보에서는 2호부터 4호까지 <내디시찰담>을 실어 일제가 조선을 지배한 이후부터 한국에 나타난 참혹한 현상들을 소개하였다. 이처럼 정교보는 1912년에 정교보를 통하여 일제를 비판하는 기사를 다수 실었으므로 일제는 러시아 정부에 이를 항의하여 1912년말부터 이 잡지의 간행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정교보에서는 재러한인들을 계몽하기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정교보에서는 당파를 없앨 것, 민족정신을 가질 것, 한글 가로쓰기, 노름하지 말 것 등을 주장하였다. 먼저 당파를 없앨 것을 보면, 5호 논설 <우리사鿑 우리사鿑이여>에서,

옛적이나 이제나 우리는 다 한가지 우리사람이여 내지에서나 외지에서나 우리는 다 한가지 우리사람이언마는 엇지 함으로 오늘에 이르러 비로소 김서방, 이서방에게 한이며, 함경도 경상도 사람 구별을 타파하고 다 통칭 우리사람 우리사람이라 하는가. 또 엇지 이 말이 내지에서는 성행치 않거늘 외지에서는 이와같이 성행하는가. 이 진실로 무슨 연고인고.

라고 하여, 당파를 타파할 것을 주장하고, 10호 우리주장 <당파론>에서도, 지방적 당파에 따른 파당을 비판하고, 이어서 그것은 전체사람의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흔히 몇 명의 철 모르고 간사하고 좀 꾀많고 제 명예를 탐하는 마귀의 충동으로 생기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어서 ゛나라를 사랑하는 이는 다 내 사랑하고 공경할 동지니 그가 나의 부모 형제라ゝ는 생각을 갖고 당파를 조장하는 자는 정의의 칼로 베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음으로 민족정신을 갖을 것을 보면 5호 논설 <우리사鿑 우리사鿑이여>에서,

비노라 우리사람들이여 우리는 우리사람같은 정신을 깊이 깊이 갖고 이 정신을 실지로 행하여 차라리 내 손으로 우리사람의 빰을 칠지언정 외국사람에게는 맞지 않게 하며, 불행히 나라집은 잃었을지언정 우리사람의 혼은 잃지 말지어다.

라고 하고, 민족정신을 갖고 있으면 국권회복의 날이 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함께 정교보에서는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하여도 노력하였다. 먼저 105인 사건의 재판 기록을 1회부터 11회로 나누어 게재하였던 것이다.

) 정교보 6호부터 105인 사건을 게재하고 있음. 특히 6호 본국통신 <애국당공판젼말>에서는 4회까지의 공판기사를 5페이지에 걸쳐 실었다.

9호 우리글이라는 제목하에 <가로쓰기라>에서는,

우리민족의 제일 큰 보배가 우리 글이오, 세계에 가장 과학적이오, 편리한 것이 우리 글이라. 그러나 그 좋은 우리 글도 쓰는 법을 잘못하여 교육과 문서상에 불편함이 많았나니 날로 문명이 나아가는 오늘날 엇지 그대로 갈수 있으리오. 이제는 새로 쓸 법은 연구하여야 하리로다.

라고 하여 한글의 위대성을 찬양하고 이를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풀어쓰기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교보에서는 또한 노름하는 재러한인들을 계몽하고자 하였다. 4호에는 <노름을 경계하는 말>(대동공보초등)을 게재하고 있는 것이다. 총회에서는 이들 동포들에게 노름하지 말것을 계몽하였고,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우름금광을 들 수 있다. 6호 논설 <우륨금광동포를 치하폑>에 보이는 바와 같이 흑룡강 연안에 있는 우륨 금광동포들을 계몽한 결과 다음과 같은 성과를 이루기도 하였다.

1. 야학교를 설립하고 토론회를 조직하여 지식을 발달하며

1. 술과 약담배와 잡기를 엄금하여 행위를 단정하게 하고 또한 재정을 예비하며

1. 여러가지 신문과 잡지를 구람하여 본국의 형상과 세계의 정형을 손금 보듯하여

애국심을 격렬하게 하며 지식을 풍부케 하며

1. 의연금을 다수히 모집하여 각 신문과 각 학교에 기부하지 않이한 곳이 없으며

1. 국가나 개인간에 진정한 종교가 없으면 도저히 유지치 못할 일로 알고 일제히

세례를 받고 정교회에 돌아왔으며 또한 본보의 주인옹되기를 자담하더라

또한 치따시에 있는 동포 12명도 계연회를 조직하고 아편 흡연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 정교보 4호 잡보 용맹있는 계연회 그렇다고 하여 모든 지역에서 이러한 계몽이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일진회 회원들과 계몽을 주창하는 일부 사이비들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 정교보 8호 장응규의 기서 알로현샹

또한 10호 <우리나라 명절>에서는 설, 보름, 한식, 단오, 추석 등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어서,

이는 우리나라에 예로부터 지켜 내려오는 큰 명절이니 우리는 그 뿌리를 캘 필요가 없고 오직 수천백년 우리 조상이 즐겁게 지켜오던 것만 생각하여도 정이 들지라. 조상을 공경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자 마땅히 지킬 것이온 하물며 그뜻이 매우 깊고 그 취미가 매우 큼에리오. 혹 예수교 신자는 이를 우상 섬기는 날이라 하여 배척하거니와 그럴 필요는 없나니 제사에 쓰던 것이라 하여 누가 밥먹기를 그만두리오. 음식을 차려 놓고 절만 아니하였으면 그만 일지니 춘추로 조선의 무덤을 돌아봄은 향기로운 일일지며 또 예로부터 손떼먹여 지켜오던 것을 보존함이 그 국민성을 보존하고 애국심을 배양하는데 매우 영향이 큰 지라

라고 하여 예로부터 내려오는 명절을 지키는 것이 국민성을 보존하고 애국심을 배양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정교보에서는 9호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보다 강화하였다. 특히 그 이전과는 달리 독립전쟁론과 더불어 대중에 기반을 둔 운동의 전개를 주장하였다. 그것은 1차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았고, 또한 1914년이 갑인년으로서

)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1914년 4월 7일자로 안창호가 이강에게 보낸 편지ゝ, セ도산안창호자료ソ(1), p. 109 러일전쟁 10주년이었으므로 이를 기화로 독립전쟁을 전개하고자 한것이 아닌가 한다.

9호에 실린 우리주장 <농촌게발의건>은 투쟁방법론에 있어서 시사하는 바 크다.

) 권업신문 1914년 5월 3일 이 글에서는 기존의 운동 목적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평가하였다.

1. 우리민족에게 민족정신을 넣어주고

2. 외국에 동화하기를 막고

3. 문명한 지식을 주어 생각이나 말이나 행실이 문명한 사람답게 하여

4. 굳고 주의가 선 단체를 일으키고 인재와 재정을 모아 오늘날 할일을 준비함

그러나 오늘날까지 하여오던 계획은 조금 인심을 진작시킨 것 외에는 실패하였다고 지적하고 그들은 지금껏 위의 네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단체를 조직하고, 학교를 설립하고, 신문과 잡지를 간행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단체, 학교, 신문, 잡지 등은 운동선상에서 각각 단점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고, 단체의 경우 사람의 수가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회원의 지식과 정신과 통일이 중요하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경우는 아직 큰 단체를 지도할 만한 정도에 도달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학교의 경우도 한국 정부도 없고, 아들, 딸을 가르치겠다는 생각도 없으니 무엇으로 학교 교육을 시행할 것인가 반문하고, 밤낮으로 학교 교육을 부르짖어도 다만 입만 달을 뿐이라고 하였다. 신문, 잡지의 경우도 동포들의 대부분이 글을 보고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효력이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ぢ우리동포는 아주 없는 것으로 치고 뿌리부터 새로 만들 결심과 수단을 써야 할지니 백성은 나라의 밑등걸이라. 이미 있는 나라도 그 백성에게 다른 민족과 경쟁하여 능히 한나라를 붓들어 갈 만한 힘이 없시는 그 나라를 보존하기 어렵거든 하물며 한번 없어졌던 나라를 다시 셰움에리오. っ 라고 하여 국권회복을 위하여 농촌개발주의를 제창하였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방법 11가지를 제시하였는데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상당한 교육과 정성있는 사람 하나이나 혹 둘씩 한 촌 중에 둠

2. 그 사람은 몸소 농업이나 기타 동리와 관계깊은 직업을 잡음, 농업이 아니면

의원이 가장 좋을 듯

3. 제 가정과 집 다스림과 몸가짐으로 남의 모범이 됨

4. 너무 급하여 말고 점차 점차 여러 부모 형제와 친하기로 주지로 삼음

5. 촌 중에 어려운 일이 있거든 제가 먼저 나서서 정성으로 보아줌

6. 방안과 마당의 청결이며 길을 넓게 깨끗이 하고 식목을 장려하되, 제가 먼저하

여 촌 중 여러 동포에게 그 사상을 준후에 권유함

7. 청년과 아이들과 친하여 동무가 되어 은연 중 그 언행과 마음을 바로 잡되 결

코 가르치는 태도로 하지 말 것

8. 틈있는 대로 세상이야기며, 문명한 나라 사람의 살아가는 형편과 사이에 끼여

나라없는 사람은 망할 것을 이야기 하여 줄 것

9. 아무쪼록 촌중의 나쁜 습관을 고치되, 아주 온순히 할 것

10. 이리하다가 차차 마음이 열려 나를 신용하게 되거든 교육의 필요와 단합의

필요도 말하여 주며 몸소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되 부모의 마음에 나지

아니하게 하며 신문 잡지와 기타 서적을 장려하고 야학도 시킴이 좋으며

11. 그리 되거든 계 같은 것을 두어 그 동리에서 나는 것을 다 거기서 사고, 동리

에서 쓸 것을 거기서 팔아 일면 동리의 이익을 주는 동시에 일변으로는 단체

의 재정을 불릴 것

정교보에서는 만약 이렇게 된다면 재러동포들의 마을은 곧 문명한 곳이 될 것이고 재러동포들에게 총과 칼이 없으되 족히 한나라를 지킬만한 능력이 생길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갑자기 단체를 조직하라, 학교를 설립하라, 돈을 내어라 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동포들이 반항하는 것이라고 하고, 만약 독립군들이 아무것도 달라는 것 없이 도리어 동포들을 위하여 심부름꾼이 되고 그들을 계몽하면 누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않겠는가 반문하였다. 즉 정교보에서는 농촌에서 동포들을 기반으로 하여 동포들의 신뢰를 얻은 토대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10호 우리주장 <애국심을 잘못 고취폁엿다>에서는 소영웅주의를 비판하였다. 즉, 독립군 대장은 되려고 하면서 독립군은 만들려고 하지 않음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10호 우리주장 <고래 럡국쟈의 폁던 손씨>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이 영웅노릇만 하려고 하지 말고 나라를 찾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라는 뜻으로 몸소 모범을 보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럴 경우에만이 일단 유사시에 모든 동포들이 궐기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그대가 만일 일미전쟁이나 일아전쟁을 기다리고 기생집이나 외국으로 살금살금 몸이나 피하여 다니면서 주둥이만 살아 사설 영웅이나 되었던들 영원히 한국은 없어지고 말았으리라. 그러나 다행히 우리 애국지사들을 옳은 길을 밟았음으로 나라를 회복하여 우리가 자유의 행복을 누리게 되였으니 기쁜소리로 만세나 부르자 -セ신대한 만세! 만세! 만만셰!ソ

라고 하여 미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을 기다려서 독립전쟁을 하겠다는 독립전쟁론을 비판하고 즉전즉결을 주장하였다.

한편 정교보에서는 독립전쟁을 위한 재러한인의 교육도 강조하였다. 11호 우리주장 <재외동포의 현상을 론폁야 동포교육의 긴급폑>에서는 ぢ교육이로다-그리하여 나라를 찾음이로다っ라고 이어서 현재 러시아에 있는 두 단체 즉 권업회와 시베리라총회에서 교육을 위하여 할 일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일. 그 단체를 지도하는 이가 적어도 한달에 한두번씩 동포 개발에 긴요한 몇가지

지식을 각 지방회나 지회에 보내어 모든 회원에게 설명하여 배우게 하며 고

쳐야 할 행실과 행해야 할 새일을 지시함이며,

이. 긴요한 신문 잡지나 서적 보기를 독촉 장려함과 전국민의 경전이 될만한 서적

한권을 편찬하여 모든 동포로 하여금 늘 외우게 함도 긴급하도다.

삼. 매 통상회일과 주일을 이용하여 회당에서 교인들을 가르치는 모양으로 몇가

지씩 좋은 사상과 지식을 고취하여 회에 오는 것을 학교에 다니는 줄 알게

하고,회원을 학생으로 여겨야 할지니, 이리하여야 여러 동포가 능히 새나라

를 건설 할만한 새국민이 될지며 외인에게 받던 천대를 면하고 그뿐더러 회

와 회원의 관계가 가까와 질지라

즉 통상 모이는 날과 주일을 이용하여 회원들에게 새나라를 건설할 만란 새국민이 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하며, 이럴 때만이 회와 회원의 관계가 가까와져 회원의 지지하에 회가 운영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회원을 가르치는 것이 당국자의 최대의 급무이며, 회원의 최대 급선무는 밤낮으로 배우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더욱 주목되는 것은 결국 이러한 배움은 독립전쟁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멀지아니하여 큰 전쟁-바라고 바라던 독립전쟁을 하여야 하겠다. 그 때에 병정될이도 우리 대장될이도 우리 군량 마련도 우리 총 검 장만도 우리가 하여야 한다. 마음으로 준비하고 돈으로 준비하여라. 전술도 배우자, 남에게 책을 읽어 달라서라도 싸움을 하는 법을 대강 배우자 백두산 위에 깃발 풀풀 날거든 모두다 우리 달려가자

라고 하여 당면 목표가 독립전쟁임을 천명하고 독립전쟁을 위하여 전술과 전투하는 법등을 배울 것을 주장하였다. 정교보의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가져 1914년 수랍스크 숭동학교 낙성식을 거행할 때에 그곳 부인회에서 돌린 공함에는, ぢ속히 독립군을 양성하여 조국의 독립을 회복하라っ 고 되어 있었던 것이다.

) 정교보 10호 잡보, pp. 26-27

한편 정교보에서는 사회주의를 소개하고 있다. 이 점은 주목된다. 동시기 연해주 지역에서 간행된 권업신문에는 이러한 내용이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 중심의 시베리아 총회의 기관지이며,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잡지라는 점을 주목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9호 새지식 중에 <로동쟈문뎨>에서 사회주의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옛날에는 사회의 중류이상 계급되는 자가 하류 사람을 종같이 부렸으나 차차 자유 사상이 퍼지고 교육이 보급되며 하류 사회에서도 문명한 지식을 얻어 현하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라. 자유평등이니 사람위에 사람없고 사람밑에 사람도 없다하여 결코 상류라는 계급의 압제를 받으려 아니하고 또 양식을 짓는 이도 우리며 모든 기계나 물품을 만드는 것도 우리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산은 말끔 우리 것이라. 상류라는 자가 제것인데 함은 우리를 억지로 누르고 우리 것을 도적함이라는 생각이 팽창하여 아주 이 사회제도를 뒤집어 옵고 천하 재산을 꼭같이 나누자 함이 곳 그들의 이상이니 이것이 곧 사회주의라.

즉 비록 초보적인 사회주의 사상을 피력하고 있으나 다른 재러한인이 발간했던 신문과 달리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결론-러시아 한인민족운동의 특징

지금까지 1905년이후부터 1914년 제1차세계대전 발발까지 러시아에서 전개된 한인민족운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먼저 이를 간단히 요약하고 아울러 러시아 한인민족운동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편에서는 해조신문과 대동공보를 중심으로 구한말 연해주 지역의 한인민족운동에 대하여 검토해 보았다. 두 신문의 경우 신문의 간행· 사원· 내용 및 그 폐간 등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해조신문은 1908년 2월 26일에 연해주의 블라지보스또크에서 창간된 교포신문으로 일간으로 간행되었다. 간행에 주요한 역할을 담담한 인물은 정순만과 최봉준이며, 특히 최봉준은 이 신문의 운영에 있어 재정적인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해조신문은 조선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간행되었으며, 한글로 간행된 것이 하나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신문의 체제는 논설· 잡보· 외보· 전보· 기서· 소설· 만필· 본항정보· 광고· 별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조신문의 발행인 겸 편집인은 최만학과 듀꼬프이며, 사장은 최봉준이었다. 주필 및 기자로는 장지연· 정순만· 이강· 김하구 등이 일하였으며, 박영진, 이종운, 한형권 등이 각각 문선과 번역을 담당하였다. 그 밖에 기계는 일본인 대죽차랑과 한국인 1명이 맡았다.

해조신문은 내용에 있어서 국권의 회복과 재러동포의 계몽에 비중을 두었다. 동포들의 교육, 풍속의 교정, 민족적 단결의 강조, 국내외의 의병활동 소개, 일제의 만행 비판 등이 그것이다. 반면 재러한인의 삶과 직결된 당면문제 즉 러시아의 한인 배척 등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이러한 해조신문은 통감부에 의한 국내에서의 계속적인 압수와 사장 최봉준에 대한 상업상의 압력, 러시아 당국의 한인독립운동세력에 대한 압박, 한국인들 사이의 갈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1908년 5월 26일에 7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해조신문은 비록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간행되었으나 러시아 한인민족운동사에서 갖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고 생각된다. 첫째 이 신문은 러시아 지역의 한인들이 간행한 최초의 신문이라는 점이다. 비록 그 이전시기에 セ신종ソ이라는 잡지가 일시적으로 간행되기는 하였으나 한인 사회에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신문은 장지연, 이강 등 국내외의 명망있는 언론인들을 초빙하여 일간으로 신문을 간행함으로써 한인의 계몽과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이 신문은 국내에도 전달되어 국내 동포의 민족의식 고취에도 일익을 담당했음은 주목되는 일이다. 둘째 이 신문은 러시아 한인 사회에서 처음으로 조직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08년 이전 러시아 한인사회에는 두드러진 항일민족운동단체가 조직되지 못하였다. 다만 몇몇 한인 운동가들에 의하여 민족운동이 전개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해조신문의 발간을 계기로 민족운동가들이 이 신문을 중심으로 뭉쳤으며 그 이후 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이 조직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세째 해조신문은 그 뒤에 이 지역에서 간행되는 대동공보· 대양보 ·권업신문 등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하겠다.

대동공보는 구한말 일제의 조선침략이 더욱 노골화되던 시기에 러시아 블라지보스또크에 거주하고 있던 동포들에 의하여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1908년 11월 18일 창간되어 1910년 9월 1일까지 약 2년동안 간행된 한글 민족지였다. 이 신문의 종지는 동포의 사상을 계몽하여 문명한 곳으로 나아가게 하며 국가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이었다.

신문사의 주요 임원은 차석보, 최재형, 유진률, 윤필봉, 이강 및 러시아인 미하일로프 등이었다. 신문의 주요 구성원의 학력은 주필 등만이 구학문과 신학문을 공부한 인물이며, 출신지역은 함경도, 평안도, 충청도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특히 함경도 출신이 다수를 이루고 있으며, 그들은 바로 대동공보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해 주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평안도, 충청도 출신의 인물들이 주로 주필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입사전 활동을 보면 주필로 활동했던 인사들 가운데 해조신문, 그리고 미국에서 간행된 공립신보 등에서 일한 사람들이 보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직업을 보면 대체로 상업에 종사하는 인물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신문의 운영을 담당한 간부들로서, 재정을 담당하는 주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다수는 러시아에 귀화한 자들로 생각된다.

신문은 주 2회 간행되었으며, 발행 부수는 1,500부 정도였고, 러시아 지역은 물론 국내, 중국본토, 만주, 미국, 멕시코, 영국, 일본 등지에도 발송되었다. 신문의 체재는 논설, 전보, 외보, 제국통신, 잡보, 기서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가운데 제국통신은 국내의 소식을 전하는 난으로서 일제에 대한 비판 기사도 상당량 싣고 있다. 잡보에서는 재러한인 사회의 동정과 러시아 극동 총독의 동정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신문의 내용 중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크게 네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국권회복, 러시아 지역 한인 사회에 대한 소식, 국내 소식, 러시아의 한인 배척과 재러한인의 대응 등에 관한 것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특히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국권회복과 러시아의 한인 배척과 재러한인의 대응에 관한 것이다. 우선 전자를 보면 대동공보에서는 국권회복을 위하여 교육을 강조하는 한편 일반국민의 의무, 의병활동, 민족의식의 고취와 관련된 기사들을 다량으로 게재하고 있다. 이러한 대동공보의 내용은 해조신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후자와 관련해서 대동공보에서는 정치적, 도덕적, 이익적 차원에서 러시아의 한인 배척 정책이 타당한 정책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인들이 한국인을 일본의 압잡이로 보는 관점에 대해 일일이 사례를 들어 비판하였다. 이러한 대동공보의 내용은 재러동포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해 주는 것으로서 해조신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대동공보가 해조신문보다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재러동포들의 입장을 보다 적극적으로 대변해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뿐만아니라 대동공보는 해조신문에 비하여 보다 항일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한일합방에 대하여 피로써 투쟁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안중근의거와 관련된 기사를 집중 보도하는 등 항일적인 성향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이처럼 재러한인의 권익과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던 대동공보는 일제의 요청에 따른 러시아 당국에 의해 1910년 9월 1일 폐간되고 말았다. 그러나 재러한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10년대에 セ대양보ソ, セ권업신문ソ, セ대한인졍교보ソ 등의 교포 신문과 잡지등을 계속 간행, 조국의 해방을 위한 언론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결국 구한말 러시아지역의 한인 민족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 이후 국내에서 망명한 애국지사들에 의하여 재러동포들 사이에 민족의식이 태동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해조신문이 간행된 1908년에 이르러 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이 모두 절정기에 이르렀던 것 같다. 그러나 러시아의 한인에 대한 경계론의 확산과 러일간의 외교적인 마찰 등을 피하기 위한 러시아측의 태도 등으로 무력을 통한 의병운동은 점차 쇠퇴하기에 이르렀으며, 운동의 방향은 자연 계몽운동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시기에 한인 민족운동을 이끌갔던 것이 바로 대동공보였다. 즉 대동공보는 1909년부터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점되기까지 연해주 지역 항일운동의 중추를 이루었던 것이다.

2편에서는 1910년대 전반기 연해주지역에서 조직된 권업회와 그 기관지 권업신문을 통하여 연해주지역의 민족운동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권업회는 1911년 12월 19일 러시아 블라지보스또크에서 조직된 연해주 지역 재러한인의 권익 옹호기관이자 독립운동 단체였다. 지금까지 연해주 지역 한인 전체를 대표하는 기구가 없었던 점을 상기해 볼 때 이 단체의 설립은 한인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전에는 함경도파, 평안도파, 서울파 등으로, 또는 토착세력, 외부이입세력 등으로 나누어져 각각 군소단체들이 난립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단체들은 일제의 조선 강점, 러시아의 대한인정책의 변화 등에 발ꁹ추어 하나의 단체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권업회는 조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점된 상황하에서 망국민에 의하여 해외에서 조직된 단체라는 기본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권업회는 그 설립과 활동, 해산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대한인정책의 강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업회는 자신의 주변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며 재러한인의 권익옹호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농작지개척활동, 입적 청원활동 등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권업회는 권업회 발기회와 근업회 등을 모태로 하여 설립되었으며 러시아에 있는 한인단체 중 처음으로 러시아 당국의 공식 인가를 받은 단체였다. 창립초기에는 이상설, 이종호 등 서울파와 함경도파가 그 중심을 이루었으나 점차 함경도파가 그 세력을 장악하였으며 그 중심도 이종호에서 김도여, 최재형, 이동휘 등으로 이동하였다.

권업회는 중앙에 중앙조직을 두는 한편 지방에 지회를 두어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1914년 7월 경에는 연흑룡주에 10여개의 지회를 두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니꼴라예브스크지회, 하바로브스크지회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권업회는 창립시 회원이 300여명이었으나, 1914년 1월에는 7천명, 동년 7월에는 1만명에 이르렀다.

권업회의 재정은 회칙상 회원의 의무금, 유지가의 의연금, 업무 이익금, 연례금 등으로 충당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권업회의 총회 유지 및 신문 발간의 대부분의 비용은 권업회의 산파역인 이종호가 부담하였다.

권업회는 재러한인의 권익옹호와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단체였다. 그러므로 이를 추진하기 위하여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권업신문의 발간은 권업회의 중점적인 사업었다. 그 점은 권업회의 재정 지출 중 권업신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제일 높다는 사실을 통하여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권업신문은 1910년 이후 안정된 러일관계를 바탕으로 일본측이 러시아측에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탄압해 줄 것을 요청하는 가운데 연흑룡주 곤다찌총독이 한인에 대한 유화정책을 추진하여 일본의 이러한 요청을 일체 거절하는 분위기 하에서 한국인들의 자주적인 노력에 의해 간행된 신문이다. 이 신문은 1912년 4월 22일(러)부터 1914년 8월 30일까지 약 2년 반동안 총 126호가 간행되었는데, 특히 국권회복과 민족주의를 그 간행 목적으로 하고 있는 민족지로서 주목되고 있다.

권업신문은 권업회의 기관지로 간행되었으나 초창기부터 권업회의 기관지는 아니었다. 권업회가 공식출범하기 이전인 1911년 7월 26일(러)부터 권업회발기회에서는 청년근업회의 기관지였던 대양보를 기관지로서 발간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물론 대양보의 발간 목적 역시 권업신문과 일치하였다.

권업신문은 순한글로 간행되었으며, 1주일에 1회 4면으로 일요일에 간행되었다. 그리고 그 체재는 논설, 각국통신, 전보, 본국통신, 잡보, 광고, 기서 등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논설과 잡보인데, 논설에서는 권업회의 주장을, 잡보에서는 재러한인의 동향을 게재하고 있다. 그리고 권업신문은 필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재정은 주로 이종호에 의지하였다. 그 밖에 기부금, 광고료, 구독료 등이 재원이 되었다. 권업신문에 참여한 주요 인물로는 신채호, 이상설, 윤해, 김하구, 장도빈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국내외에서 언론에 종사했던 인물들이었다.

신문의 내용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재러한인의 권익옹호에 대한 것과 민족문제에 관한 것이다. 전자와 관련하여서는 농작지 개척활동, 입적청원활동 등을 들 수 있으며, 후자로는 재러한인의 계몽, 민족의식의 고취 등에 대한 기사들을 들 수 있다.

권업신문에서는 1908년에 블라지보스또크에서 간행된 대동공보의 후반기 내용처럼 무장투쟁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부터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의 시대적 상황과 러일관계, 연흑룡주 총독의 대조선인정책, 한국인들의 역량의 정도 등과 서로 관련鱁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권업신문은 치따의 대한인정교보와 함께 1910년 이후 1914년까지 러시아지역에서 한국인들에 의하여 간행되었던 대표적인 항일언론지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권업회와 권업신문은 모국이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된 상황하에서 이국땅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에 의한해 조직된 단체이며 신문이라는 기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더구나 러시아의 대한인정책은 이들의 활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 이러한 주변 여건 속에서 권업회는 곤다찌 총독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재러동포들의 권익옹호와 계몽 등을 통한 지식의 발달, 민족의식의 고취 등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연해주지역에서의 재러한인들의 민족운동은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이 연합국이 됨으로써 쇠퇴하게 되었다. 그 후 권업회에서 활동한 인물들은 러시아 혁명 과정을 거치면서 이동휘, 김립, 최재형은 등 대다수의 인물들이 대한국민의회, 한인사회당 등에 참여하여 혁명이후 한인민족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3편에서는 1910년대 전반기 자바이깔 지역의 민족운동을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총회와 그 기관지인 セ대한인졍교보ソ를 통하여 살펴보았다.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의 경우는 성립배경, 성립, 활동, 재정 등에 대하여, セ대한이졍교보ソ의 경우는 간행, 구성원, 내용 등을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는 자바이깔 지역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한인의 대표기구이자 독립운동단체였다. 이 단체는 비록 대한인정교라고 하는 러시아정교를 이용하여 단체를 이끌어 나갔으나 사실상 독립운동 단체였다. 뿐만 아니라 이 단체는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의 시베리아지방총회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즉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와 유기적인 관계속에서 단체가 운영되었던 것이다.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는 공립협회 원동지부가 발전되어 조직된 국민회 원동지부를 바탕으로 1911년 10월 이강, 정재관 등 국민회계열의 인사들에 의하여 자바이깔주의 수부인 치따에서 조직되었다.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치따로 이동한 것은 연해주 지역의 함경도파, 서울파 등과의 지역적인 갈등과 의병파와의 투쟁노선상의 갈등, 러시아측의 탄압 등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치따지역의 인적 물적기반, 치따지역의 국민회 세력과 그들의 항일의지, 안창호의 영향력 등이 치따에 시베리아총회의 본부를 두게 하였다.

창립당시 시베리아총회의 주요간부는 회장 박집초, 부회장 태용서, 서기 탁공규 , 극동전권위원 이강 등이었다. 그리고 관할 지역은 치따, 하바로브스크, 미영, 상우진 등 9개 지방회였으나 1913년에는 16개 지방회로, 1914년에는 21개 지방회로 그 세력이 확대되었다.

시베리아총회는 1913년, 1914년에 각각 한차례씩 2차에 걸쳐 치따에서 대의원총회를 개최하여 운동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추진하였다. 주요 사업으로는 기관지인 대한정교보의 간행, 독립전쟁을 위한 민족교육의 실시, 실업의 발전,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노력, 군자금 마련을 위한 애국저축의 시행 등을 들 수 있다.

시베리아총회의 재정을 보면 수입금은 예납금, 별연금, 교육금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13년 5월 당시 수입금은 1,314원 13전이었고, 1914년 6월 당시의 수입금은 1,485원 39전이었다. 지출내역을 보면 1913년 5월에는 문서비, 통신비, 중앙총회 예납금, 잡비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1914년 6월 당시는 교육비, 통신비, 중앙총회예납금, 문서비, 봉급, 사업확장비, 임시비, 貸金 등으로 이전보다 다양해졌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1914년도 예산안(1914.6-1915.6)을 보면 지출예정내역이 중앙총회 예납금, 교육비, 봉급, 문서비, 통신비, 사업확장비, 대의회비, 대한인정교보 간행비, 위원파송비, 임시비, 적립금 등으로 더욱 광범해지고 있다.

대한인정교보는 1912년 1월 2일 러시아 자바이깔 지역 치따에서 간행된 한글 잡지로 그 이름을 セ대한인졍교보ソ라고 하였다. 이 잡지는 비록 러일관계, 러시아의 대한인국민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 등으로 인하여 간행자가 러시아 정교 치따교구로 되어 있고, 그 명칭 또한 종교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으나 사실은 미주에 본부를 두고 있는 대한인국민회의 시베리아 지방총회 기관지였던 것이다. 정교보는 창간시에는 매월 1일 한 차례씩 간행할 예정이었으나 일본의 방해, 1차세계대전의 발발 등으로 인하여 1914년 6월에 간행된 11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정교보가 몇 부 정도 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배포지역은 러시아에 한국인이 거주하는 주요 지역뿐만 아니라, 중국, 만주, 일본, 미국본토와 하와이, 멕시코 등지로서 세계 여러 곳의 동포들에게 전달되었다.

정교보는 재정에 있어 문윤삼, 고성삼 등의 동포들이 힘을 합하였다. 그러나 그 돈은 큰 것이 되지 못하였으므로 항상 정간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에 권의부 설치를 통해 기부금을 모집하고, 광고료 등으로 그 재정을 충당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주 본부로부터도 일정량의 재정적인 후원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이강 등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의 상당 부분이 재정적인 지원에 대한 호소인 점에서 알 수 있다.

정교보 창간시의 주요 구성원은 사장 안계화, 부사장 고성삼, 총무 남창석, 서기 탁공규, 재무 박대선, 발행인 문윤함, 편집인 박집초, 주필 이강, 기술인 정재관 등이었다. 이들 구성원은 몇 차례 변동이 있었으나 그들 사이에서는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그들의 대부분은 치따국민회의 구성원, 금광지역에 거주하는 인물, 미주 대한인국민회와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편집실에는 이전에 언론계에서 활동한 인물들이 산견되고 있다.

정교보의 내용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호부터 8호까지와 9호부터 11호까지이다. 전자에는 러시아정교와 관련된 내용이 항일운동과 관련된 것보다 많은 반면에, 후자에는 우리 민족의 당면 과제인 독립운동에 대한 내용들이 보다 강조되고 있다. 특히 후자의 9호부터는 그 이전과는 달리 독립전쟁론 가운데서도 즉전즉결을 주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재러동포들에 기반을 둔 운동의 전개를 주장하고 있다.

결국 정교보는 1910년대 전반기에 블라지보스또크에서 간행된 권업신문과 함께 러시아지역 한인 독립운동을 주도한 항일 언론지라고 하겠다. 그들은 재러한인들을 기반으로 하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으며, 또한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다만 권업신문이 연흑룡주를 대변하는 신문이라면, 정교보는 자바이깔 지역의 한인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전자가 국내에서 망명한 인사 및 러시아에 일찍부터 이주해 온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간행한 것임에 반하여, 후자는 미주에서 온 인물들이 중심이 된 것이라고 하겠다. 아울러 지적될 수 있는 점은 대한인정교보는 대중을 바탕으로 한 운동의 전개와 즉전즉결의 무장투쟁을 주장하고 있는 점, 그리고 초보적인 형태이기는 하나 진보적인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자바이깔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와 그 기관지 대한인정교보는 1914년 후반 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그 세력이 위축되고 결국 1915년 5월 러시아에 의해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뒤 자바이깔지역에서 전개된 혁명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제 구한말 및 1910년대 전반기의 러시아 지역 한인민족운동의 특징을 몇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05년부터 1910년까지 한인들의 활동 무대는 연해주지역에 집중되었다. 노보끼예브스크, 우수리스크, 블라지보스또크 등은 그 대표적인 지역들이었다. 그러나 1910년대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가 치따에 설치되면서 한인의 독립운동 영역은 馱스크, 이르꾸쯔크, 옴스크 등 자바이깔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둘째, 러시아 지역의 한인민족운동은 1905년 이후에 시작되었으며, 1905년부터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 시기까지는 외부이입세력 즉, 국내에서 망명한 인사들과 만주와 미국에서 온 인물들이 주도하였다. 이종호, 장지연(국내), 정순만, 이상설(만주), 이강, 정재관(미국)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1910년 이후부터 1914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연해주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경제적인 이유로 함경도 지방에서 러시아로 망명한 최재형 등 토착세력과 국내와 만주에서 온 인물이 활동하였고, 자바이깔 지역에서는 문윤함 등 토착세력과 미주에서 온 인물들이 활동하였다.

셋째, 1905년부터 1910년까지는 외부이입세력이 운동을 주도한 반면, 1910년 이후가 되면 처음에는 외부이입세력과 토착세력의 상호 연합에 의해서 운동이 추진되다가 점차 토착세력이 주도권을 가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외부이입세력은 정치적 망명가들로서 풍부한 식견의 소유자였고, 러시아에 귀화하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러시아에 한인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신문 발간에 있어서도 주로 주필 및 기자로 참가하여 재러동포들을 계몽하는 한편 그 지역의 여론을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적 목적에 주로 관심이 있었으므로 재러한인의 경제적인 삶의 문제, 러시아의 재러동포 배척문제 등 재러한인과 관련된 현실적인 문제에는 토착세력보다 관심이 덜하였다. 그러나 운동이란 것이 경제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가 잘 조화될 때 가장 활발히 전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외부이입세력의 운동방향은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세력도 점차 이러한 한계를 느끼게 되었으며, 그 결과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에는 토착세력의 주장을 적극 수용하게 되었던 것 같다. 권업회에서의 입적청원활동의 전개라든가,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의 이강, 정재관 등이 그들이 신앙하던 기독교를 버리고 러시아정교를 적극 수용, 이를 운동의 방편으로 이용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추측된다. 아울러 대한인정교보에서 소영웅주의를 배척하고 대중을 중심으로 한 운동을 강조하고 있는 점, 사회주의 이념을 소개하고 있는 점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외부이입세력들은 연해주의 경우 권업회 시절부터, 자바이깔 지역의 경우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 시절부터 점차 토착세력들에게 주도권을 이양하게 된다. 토착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은 최재형, 김도여(연해주), 김인수, 안계화, 문윤함, 고성삼(자바이깔주) 등이다. 이들은 연해주와 자바이깔 지역에서 출생한 인물들로서 귀화인이 다수이며, 그 지역의 경제적 지도자였고, 민회 등 자치기관을 이끌었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자연 재러동포의 이익에 민감하였고, 독립운동의 자금을 주로 제공하기도 하며, 신문의 경영진을 맡기도 하였다. 즉 러시아 지역의 독립운동은 정치적 활동에 보다 관심을 갖고 있던 외부이입세력과 재러동포의 사회 경제적 문제에 보다 관심을 기울였던 토착세력간의 갈등과 조화 속에서 운동이 변화 발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양지역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처음에는 러시아로 정치적 망명을 한 인물들이 그 지역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으나 점차 토착세력이 민족의식을 갖게 되면서 대중적인 지지 기반을 갖고 있던 그들이 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대중적인 기반 위에서만이 운동이 지속화될 수 있고 보다 강화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결국 재러동포 전체가 운동의 참여세력으로 전면에 나서야 한국의 독립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운동의 일진보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연해주 지역에서는 의병투쟁과 애국계몽운동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노보끼예브스크 등 국경과 가까운 농촌 지역에서는 의병투쟁이, 블라지보스또크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해조신문, 대동공보 등이 간행되는 등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과 이범윤 등 의병지도자들의 이르꾸쯔크로의 유배 등을 계기로 러시아 지역에서의 항일운동은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즉 이 시기의 대표적 한인단체인 권업회와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는 러시아 정부의 공인하에 합법적인 단체로서 재러한인의 교육과 실업의 장려 등을 적극 추진하였던 것이다. 특히 권업신문과 대한인정교보 등 신문과 잡지의 간행을 통하여 재러한인의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다섯째, 러시아 지역의 한인 민족운동은 독립운동가의 출신 지역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지연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권업회는 함경도파와 서울파가,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의 경우는 평안도파가 주도하였다. 이는 밀정들이 우글거리는 해외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혈연이 같거나, 출신 지역이 같은 사람들 밖에 없다는 인식에 기인한 것 같다. 그리나 이러한 생각은 민족주의, 공산주의 등 이념이 운동을 주도하기 전단계에 있어서 사람을 단결시킬 수 있는 주요한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이 가능하였으며, 또한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연성의 지나친 강조는 당파성을 조장하고 운동을 분열시키기도 하였다. 대동공보 시절 정순만의 양성춘 살해사건, 1910년대 양성춘의 형 양득춘의 정순만 살해사건 등은 지역적인 갈등을 노출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재러동포들은 이러한 지역적 갈등을 최대한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해조신문, 대동공보, 권업신문, 대한인정교보 등을 통하여 당파성의 타파를 계속해서 주장하였다. 실지로 권업회 조직 당시에는 재러한인 사회의 최대 지연 조직인 함경도파와 평안도파, 그리고 서울파 등이 일시적이나마 연합하였으며, 단결을 지속화시키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또한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의 경우 지연을 떠나 러시아종교, 즉 한국인들을 대한인정교라는 종교를 중심으로 단합시키고자 하는 발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움직임은 1917년 이후 사상중심의 운동단체를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여섯째, 러시아지역에서의 운동은 러시아 당국의 대한인정책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구한말에는 운떼르베르게르 총독이 한인배척론을, 1910년대에는 곤다찌 총독이 한인이용론을 주장하였다. 전자는 한인들을 일본의 압잡이로 인식하여 노동현장에서도 배척하였으며 그 결과 한인들은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한인들의 여론을 주도해 가던 해조신문은 국권의 회복이라는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이 문제에 소홀하였다. 그러나 해조신문을 뒤이어 간행된 대동공보에서는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대동공보에서는 신문 지면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러시아 당국의 한인배척론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한인들은 일본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한인 또한 일본에 대해 적대 감정을 갖고 있음을 누누히 강조하였다. 또한 재러동포들에게 러시아 정부에 적극 협조할 것을 호소하여 한인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나아가서 국권회복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대동공보의 주장은 한인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대동공보는 1910년 9월 1일까지 계속 발간되었다.

후자의 경우 한인들을 이용하여 러시아 극동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자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곤다찌는 한인들이 러시아에 귀화하도록 적극적으로 유도하였으며, 미개간지를 개척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곤다찌의 정책에 대하여 한인들은 이를 적극 이용하여 권업회를 조직하고 러시아로부터 공식인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합법적으로 한인들을 조직화하는 한편 입적청원활동, 농작지 개척활동 등을 벌였으며, 권업신문의 발간 등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독립에 대비하였다.

한편 자바이깔 지역의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의 경우는 러시아정교 치따 교구의 허락 하에 대한인정교보를 간행하면서 민족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도 일본의 러시아 정부에 대한 외교적인 압력 등으로 잡지가 정간되는 등 외부적인 영향을 받았다.

일곱째, 러시아 지역의 한인운동은 러일관계의 변화에 따라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기본적으로 러시아는 일본을 적국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일본은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입장이었고,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 등지로 남하하려는 입장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러시아의 일본에 대한 적대의식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한 이후 더욱 강화되었고, 이것은 곧바로 재러동포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결과 나타난 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운떼르베르게르의 한인배척론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내면적으로 일본과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입장을 표면적으로는 나타낼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러시아로서는 러시아혁명에 참여했던 인물들 가운데 일본으로 망명해 있던 인사들을 일본의 협조를 통해 체포해야 했고, 또한 일본과의 협조 속에서 만주의 이권을 장악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러시아는 일제의 조선 강점시 이에 협조하였고, で한일합방と에 반대하는 한인들을 이르꾸쯔크로 추방하는 한편 대동공보 역시 폐간시켰다.

이처럼 러시아가 표면적으로 한인들에 대하여 배척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내면적으로 일본을 적대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방되었던 인물들을 곧 원상복귀 시켰으며, 대동공보에 뒤이어 대양보의 발간 또한 허락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연해주 지역의 한인 대표 기관인 권업회를 공식 인가하는 한편 극동 총독 자신이 그 단체의 명예회원으로 입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입장에 힘입어 권업회 등에서는 1914년 러일전쟁 1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러일전쟁이 발발할 것이고 이때 한인들이 러시아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러시아의 원수를 갚고 한국을 독립시켜야 겠다는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준비도 착착 진행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1차세계대전의 발발을 계기로 러일관계가 호전됨으로써 무산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의 협조 요청을 받은 러시아가 권업회,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등을 해산시켰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한인들의 운동은 점차 쇠퇴하였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에나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끝으로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전개되었던 한인민족운동의 변화에 주목해 보면,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연해주의 한인민족운동은 대한국민의회와 한인사회당의 조직으로 나타나며, 자바이깔 지역의 경우는 이르꾸쯔크파 공산당이 출현한다. 이들 조직의 결성은 1905년부터 혁명 이전까지 전개되었던 민족주의운동이 바탕이 되었던 것이고, 구성원들 역시 권업회와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에서 활동하였던 인물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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