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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 졍교보 ;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의 기관지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점된 이후 재러한인들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1911년 12월 17일 沿黑龍州 지역에 勸業會를, 1911년 10월 20일 자바이깔(後貝加爾州) 지역에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이하 시베리아총회로 약함)를 각각 설립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 단체들은 각자의 세력 확대와 재러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하여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권업회의 권업신문과 시베리아총회의 セ대한인졍교보ソ(이하 정교보로 약함)가 그것들이다. 그들 양 기관지는 비록 신문과 잡지라는 차이는 있으나 1912년부터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까지 각각 그 지역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가운데 특히 정교보는 1912년 1월 치따에서 간행된 이후 1914년 6월까지 총 11호가 발행되어 자바이깔지역 재러한인의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1914년 6월 15일 치따에서 개최된 시베리아총회 제2회 대의회에서 차기 예산 2,874루블 44까뻬이까 중 35%인 1,000루블을 정교보 간행비로 책정할 정도로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セ도산안창호자료집ソ(3), 독립기념관, 1992, p. 128

정교보는 시베리아총회 활동의 중추를 이루었다. 그만큼 정교보는 시베리아총회의 활동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이 잡지에 대하여 거의 주목하지 못하였다.

) 일찌기 고송무가 セ한글새소식ソ89(한글학회, 1980년 1월 5일)에 정교보 10호(1914년 5월 1일 발간)를 소개한 바 있다.

그것은 정교보를 구해 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최근 필자는 러시아를 방문하여 뻬쩨르부르크 대학 로문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홍기순의 도움으로 정교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이에 이 잡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먼저 정교보의 간행에 대하여 살펴보고, 이어서 잡지사에서 일한 인물들 그리고 잡지의 내용 등에 대하여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1910년대 러시아 자바이깔지역의 시베리아총회 활동은 물론 대한인국민회의 활동 그리고 러시아지역 한인 민족운동의 일단면을 밝혀보고자 한다.

1. 대한인정교보의 간행

미국에서 온 평안도파 이강, 정재관 등은 1900년대 후반부터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미주의 공립협회, 국민회, 대한인국민회의 러시아지부를 조직하여 주로 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李鍾浩 등 연해주지역의 토착세력인 함경도파, 그리고 李範允 등 의병파와의 갈등 때문에 1911년 9월 10일 자바이깔지역 치따시로 그 근거지를 이동하였다. 그곳 치따는 자바이깔지역의 중심지로 한국인이 100여명 거주하고 있었으며, 특히 자신들과 같은 계열인 국민회 조직이 1909년부터 이루어져 있어서 이강 등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이루어져 있었다.

) 박환,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의 성립과 활동ゝ, 미발표논문

치따에 도착한 그들은 대한인국민회 치따 지방회 간부인 文允咸, 고성삼, 김 니꼴라이 등의 주선으로

) 고성삼은 안창호가 1910년대 초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갈 때, 치타에서 일크츠크까지 동행하였던 인물로 안창호에 대한 각별한 존경심을 갖고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13년 11월 27일자로 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セ도산안창호자료ソ(1), pp. 80-81. 문윤함 등 3인 가운데 정교보의 간행에 큰 도움을 준 인물은 김 니꼴라이였던 것 같다. 처음에 치타에 도착한 이강, 정재관 등은 그와 교섭하고자 하였으나 그가 출타중이었으므로 그를 기다려 정교보 간행을 추진하였던 것이다.(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1911년 9월 23일자로 이강, 정재관 등이 최정익에게 보낸 편지ゝ, セ도산안창호자료ソ(1), p. 19)

교회와 접촉하고자 하였다.

) 정교보 9호 잡보, p. 30,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11년 11월 1일자로 문윤함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セ도산안창호자료ソ(1), 독립기념관, 1990, p. 30

이처럼 이강, 정재관 등이 처음부터 교회와 접촉하고자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시 자신들이 활동했던 연해주지역 러시아 당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기독교 장로교의 선전기구로서 인식하여 합법적인 단체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김승화저, 정태수편역, セ소련韓族史ソ,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89, p. 71

⧚러므로 그들은 연해주지역에서의 경험상 이곳에서도 자신들의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내세워서는 안되고 러시아 국교인 러시아정교를 최대한 이용해야 된다고 인식하였던 것 같다. 즉 그들은 러시아 정교를 신앙하며 이를 적극 활용,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하여 이강 등은 우선 일차적으로 자신들이 러시아정교 신자가 되고자 하였다. 이에 치따 정교회 부주교인 에프렘(ܕ݄ܼ݀ܵ)의 가르침을 받고 기독교에서 러시아정교로 개종하였으며, 에프렘의 신임을 얻기에 이르렀다.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12년 2월 12일자로 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セ도산안창호자료ソ(1), p. 57

특히 이강은 러시아정교 전도사가 되었다.

) 이광수, ゛그의 자서전ゝ, セ이광수전집ソ9 , 삼중당, 1966, p. 339

러시아 치따 교구로부터 신임을 얻은 이강 등은 이를 이용, 연해주와 미국 등지에서 신문을 간행하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月報의 간행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11년 11월 11일자로 문윤함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セ도산안창호자료ソ(1), p. 30, 이강 등이 신문이 아닌 월보의 간행을 추진한 것은 당시 그 지역 한인들의 재정 상태, 그리고 거주한인이 120-130명 이라는 점 등(신한민보 1914.4.9. 원동소식)이 고려되었던 것 같다.

그들은 월보의 간행을 통하여 재러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양, 문명화 추구, 러시아로의 동화 방지 등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재정을 마련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 정교보 9호 우리주장 농촌게발의 건

이러한 계획하에 추진된 정교보의 발간은 치따 정교회의 부주교 에프렘으로부터 허락받았다.

) 독립기년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11년 11월 16일자로 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セ도산안창호자료ソ(1), p. 46

그런데 교회에서는 한인들을 믿을 수 없어서 정교보의 간행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다음 사항을 준수하도록 하였다.

) 정교보 2호(p.32)와 3호(p. 33)에는 한글로 <본보간행의 인허를 얻은 개의가 여좌함>이라고 되어 있고, 4호, 5호, 7호, 9호, 10호, 11호 등에는 러시아어로 발행계획이라는 제목하에 10개항을 번역 게재하고 있다.

1. 거룩한 하나님의 정교회가 중세기부터 신령하게 발달된 사실을 게재할 것

2. 기도문과 찬송시와 모든 명절에 행하는 예절을 번역하여 게재할 것

3. 신앙과 도덕의 필요한 이유를 강론할 것

4. 러시아 및 한국의 정교회 역사와 현상을 게재할 것

5. 일반한인을 인도하여 환난을 건네며, 핍박을 헤치고 용맹있게 정교회에 돌아

오게 할 것

6. 한국내에 정교회의 확장된 사실과 장차 확장할 방침을 게재할 것

7. 정교회의 아름다운 문학을 게재할 것

8. 젊은 문제로

) 정교보에는 한글로는 ゛젊은 문제ゝ로 나와 있어 이해에 어려움이 있으나 러시아어로 된 준수 사항 기록에는 이 부분이 ゛雜錄ゝ으로 표시되어 있음.

한인에게 재미있게 한국의 정치와 경제의 현상을 게재할 것

9. 세계의 要聞을 게재할 것

10. 광고를 게재할 것(맞춤법---인용자)

) 앞으로 뒤에 나오는 인용문은 모두 필자가 현재의 맞춤법에 따라 교정하였음을 밝힘.

즉 치따교구에서는 한국인들이 간행하는 잡지가 순수한 종교적인 목적에 의해 간행될 것을 규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다른 내용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검열국의 검열을 받은 후에야 발매하도록 하였다.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11년 12월 20일자로 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セ도산안창호자료ソ(1), p. 49

이에 대하여 정교보를 시베리아 총회의 기관지로 적극 활용하고자 했던 이강 등은

) 시베리아 총회의 설립 시기에 대하여 필자는 김원용이 제시한 1911년 10월 20일설을 따르고자 한다.(김원용, セ재미한인오십년사ソ, 1959, p.111) 비록 이 시기에 미국에 있는 대한인국민회로부터 정식 인준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사실상 시베리아 총회 활동은 이때부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박환,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의 성립과 활동ゝ, 미발표논문) 즉 이강 등은 1911년 9월에 치타에 도착한 후 동년 11월에 시베리아총회를 조직하고 1912년 1월부터 정교보를 간행하였던 것이다.

정교보가 종교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할까 두려워 하였다. 즉 그들은 정교보를 민족운동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부주교가 정한 10조 가운데 8조, 9조의 경우가 종교적인 색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12년 2월 12일자로 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セ도산안창호자료ソ(1), p. 57

그리고 이것은 부주교 에프렘에 의하여 어느 정도 보장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한국인에게 호의적이었고, 한국인의 민족의식 고취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점은 1911년 12월 18일에 있었던 치따 한인정교학교

) 교장 이문오, 교감 이재한, 재무 임동선, 교사 김택, 러시아어 담당 최고려, 박집초, 그 밖에 교사로 송인호 등을 들 수 있다.(정교보 창간호 잡보, 정교보 8호 잡보 p. 19 참조)

개교식에서 그가 행한 연설에서 그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는,

사람마다 애국성이 풍성하면 이 날은 비록 참혹한 지경에 있지만은 내일은 안락한 땅에 나갈 수 있으며, 오늘은 비록 종된 지위에 있으나 내일은 상전의 지위에 처할 터이니 제군은 명심하여 면려하기를 바라오

) 정교보 창간호 교회소식

라고 하여 재러동포들이 애국심을 가질 것을 강조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러시아정교 치따 교구의 발행허가를 얻은 후 이강 등은 1912년 1월 2일 (구주 강생 1911년 12월 20일) 석판으로

) 정교보 창간호 본사고백

창간호를 간행하였는데 제목은 한글로 セ대한인졍교보ソ라고 하였다.

) 정교보 창간호 표지참조. 정교보 표지 상단에는 러시아어로 월간, 러시아제국의 정교도, 정교도한인들의 출판물이라고 줄을 달리하여 적었고, 이어서 십자가 안에 한글로 セ대한인졍교보ソ라고 하였다. 또한 십자가의 우측 상단에는 매월 이십일 일차 발행, 좌측 상단에는 제1권 제1호라고 하였으며, 십자가 우측 하단에는 で구주강생 일천구백십일년 십이월이십일 창간と이라고 하고, 좌측 하단에는 で건국기원 사천이백사십오년 일월초이일 창간と이라 하였다.

간행소는 치따시 아스트라한스카야 울리짜(ܐ݂݁݀ܰ݅ܰܽ݁ܺܰݏ ܻܸ݆݃ܰ)에 있는 조그마한 목조 단층집에 위치하고 있었다.

) 그 정면에는 러시아어로 ゛정교를 믿는 한인의 잡지, 정교보의 발행소ゝ라고 하였다.(이광수, セ나의 告白ソ, 춘추사, 1948, p. 88)

정교보의 창간취지는 창간호에 실린 <취지서>에 잘 나타나 있다.

본보의 목적은 일절 정치와 간섭이 없고 오직 신도의 성덕과 지식을 배양하며 믿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기로 정하여 복음의 진리와 교회의 문학과 기타 인생의 필요한 각 학술과 교회의 통신과 세계의 요문과 동포의 선악을 게재하며 일반동포의 도덕과 지식을 배양할 지며

즉 정교보는 정치와 관계없이 오직 종교적인 목적 즉, 신도의 성덕과 지식을 배양하고 비신도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기 위하여 간행된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취지서>에서는 모든 남녀노소 동포들이 널리 보도록 하기 위하여 알기 쉬운 말로 쓸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강 등은 일차적으로 재러동포들에게 정교를 믿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교를 통하여 문명화되고 단결된 재러동포들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한편 정교보는 러시아나 만주 각지로부터 각별한 관심을 받으면서 간행되었다. 블라지보스또크에서 활동하던 대한인국민회 회원 白元普는 창간호 <정교보를 축하함>에서,

정교보 소식이여 반갑고 반갑도다. 정교보의 발간이여. 기쁘고 기쁘도다. 정교보의 출세함이여 영화롭도다. 정교보의 주무하시는 이여. 감사하고 감사하도다 정교보야

라고 기술하였다. 블라지보스또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 정교 전도사인 黃公道 역시 창간호에 축사를 기고하였다. 또한 박대선도 기서 <참 좋은 소식이요>에서 정교보의 간행을 축하하였다. 그 밖에 2호에서는 신학이라는 가명으로 <정교보축사>를, 4호에서는 수청의 朴永甲, 하얼빈 교회당의 김택준, 하얼빈의 김성옥 등이 그 창간을 축하하였다.

이처럼 간행된 정교보는 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사들을 찬성원으로 하여 자문을 얻고자 하였다.

) 정교보 창간호 정교보발행규칙강령

구성원은 블라지보스또크, 소왕령, 노보끼예브스크, 연다우재, 하바로브스크, 블개미스크, 니꼴라예브스크, 이르꾸쯔크, 뻬쩨르부르크, 馱스크, 흑하 등 러시아의 각 지역과 만주의 하얼빈, 영국의 런던, 미주, 하와이 등지에도 있었다.

) 정교보 창간호, 2호, 3호, 4호에 각각 찬성원의 명단이 실려 있다.

구성원으로 활약한 인물들로는 블라지보스또크의 최봉준, 이종호, 이상설, 소왕령의 문창범, 연추의 최재형, 블개미스크의 김수려, 하얼빈의 김성백, 김성옥, 뻬쩨르부르크의 이갑, 이위종, 런던의 장택상, 미주의 안창호, 최정익, 황사용, 하와이의 이항우 등을 들 수 있다.

) 정교보 창간호 찬성원부

즉 정교보에서는 해외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수의 항일투사들의 의견을 수렴, 잡지를 운영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정교보는 창간시에는 매월 1일 (러시아력 20일) 한 차례 간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호는 1912년 1월 2일, 2호는 3월 1일(4월 1일?)

) 2호는 언제 간행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2호 마지막 페이지 본사광고에 ぢ본호가 편집을 작년 12월에 마쳤으나 발행의 인허로 인하여 지금까지 천연되고 모든 사설이 시기를 잃었사오며っ라고 하며 정교사에서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는 점을 고려해 볼 때 2호는 2월 1일이 아닌 3월 1일 또는 4월 1일에 간행된 것이 아닌가 한다. 발행이 이처럼 늦어진 이유는 러시아 당국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12년 2월 12일자로 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セ도산안창호자료ソ(1), p. 57)

3호는 5월 1일, 4호는 6월 1일, 5호는 8월 1일

) 5호에서는 5호가 7월 1일에 간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8월 1일에 간행된 데 대하여 광고에서 본사의 집 수리를 위하여 정간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6호는 9월 1일, 7호는 12월 1일

) 7호가 6호가 간행된지 3개월 후인 1912년 12월 1일에 간행된 것에 대하여 7호 <본보의 정간 이유>에서는 ぢ본보가 마귀의 장애로 인하여 10월, 11월 양삭을 정간하였으니 애독첨군자는 서량하심을 바람っ 이라고 하여 무엇인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하여 정간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8호는 1914년 2월 1일, 9호는 3월 1일, 10호는 5월 1일, 11호는 6월 1일 각각 발행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8호가 7호가 간행된지 1년후에 간행되었다는 점인데, 그것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서였다. 정교보 제2호, 3호, 4호에 연속하여 <내디시찰담>이 실렸는데 제2호 <내디시찰담> 앞 부분에,

우리나라이 을사조약이후로 저 일본이 우리한국에 대한 정책이 대개 정치기관의 장애와 교육발달의 장애와 종교일치의 방해하는 수단으로 착착 진행하여 오늘날 합방하는 결과를 지였음 즉 이에 대하여 낫낫히 말하기 어려우나 오늘날 현상이 엇더함에 대하여 간략히 말할진대

라고 하여 2호, 3호, 4호에서 황실의 처지, 행정과 사법기관, 교육, 종교, 군사, 실업 등을 중심으로 일제의 학정과 탄압을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이에 일제는 정교보가 반일활동을 하고 있다고 러시아 정부에 항의하여, 정교보는 정간되었으나 1913년 말 정교단체의 일들을 러시아 신부대신 한국인 신부인 김깐쓰탄찐이 담당하게 됨에 따라 다시 간행될 수 있게 되었다.

) ܟܴ݂ܻܸ݀ܵ݁ܰܲܵܽܵ ܻܽܰ݇ܰ݌ܸܽܺܰ ܗܱܹܻܰܰܺܰ݌ܾܹ݁ܺ ܔܾܾܹ݃݅ܲܽ ܜܸܸܸ݁݁ ܕ݄ܼ݀ܵܰ ܕܸܾܿ݁ܺܿ݃

ܗܱܹܻܰܰܺܰ݌ܾܼ݁ܺ݃ ܘܾܰܽܽ݃. ܧܸ݂ܰ(1914년 12월 30일자로 치따에서 자비이깔 종교단체 책임자 예프렘이 자바이깔 주교 이오나에게 보낸 보고서, 뻬쩨르부르크 중앙국립역사문서보관국 소장). 이처럼 1913년말부터 정교보가 다시 간행된데는 한국인 신부인 김깐쓰탄찐의 개인적인 역할이 컸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김신부가 앞으로 정교보와 관련된 문제에 책임을 지겠다는 강한 의사표현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간행, 정간을 거듭하던 정교보는 1914년 2월부터

) 1914년 2월 1일 정교보가 다시 간행되게 되었는데 8호 <한인샤회에 처음 잇는 일>에서는 1913년 가을 김 깐쓰탄찐 신부의 모친 김부인의 명의로 속간을 허락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속간을 허락받고 정교보가 1914년 2월에 간행된 것은 인쇄문제 때문이었다.(신한민보 1914년 4월 2일 원동소식) 이에 정교보에서는 활자의연을 하는 등 활자 마련을 위하여 애를 썼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정교보 9호 잡보 정교보사 활자의연을 청하나이다)

6월까지 4호가 출판되었는 데 그 내용은 대단히 항일적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1914년 8월에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러시아가 일본, 영국, 프랑스와 함께 연합국이 되어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3동맹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자, 러일관계는 더욱 돈독해졌고, 1914년 10월 뻬쩨르부르크에 있는 주러일본 대사관 측은 러시아정부에 정교보의 폐간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1914년 10월 13일자로 외무장관 C.ܔ. 사조노프(ܡܷܾܾܰܽܲ)는 내무장관 ܝ.ܐ. 마끌라꼬프(ܜܻܾܰܺܰܺܲ)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발송하였다.

뻬쩨르부르크 주재 일본대사관은 신문지면에 계속 게재하고 있는 반일선전에 대하여 우리가 주의를 돌려줄 것을 부탁하고 그의 출판을 억제시킬 것을 요청하였으며, 자기들은 일본땅에 있는 1904-1905년 전쟁 이후 러시아혁명운동 기관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했읍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나라에서의 이웃 친선 일본에 대한 반일선전은 정치적인 식견으로 보나 이 관계에서 우리가 받아들인 일부 상황들을 염두에 두면 그리 지혜롭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공동의 적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을 일본과 같이 하고 있는 이때 그러한 것을 특히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 ܟܸ݁݌ܼܾ ܜܸܸ݂ܽ݁݀ܰ ܘܾ݂ܽ݁݀ܰܽܽ݋݅ ܔܻܵ ܡ. ܔ. ܡܷܾܾܰܽܲܰ ܜܸܸ݂ܽ݁݀݃ ܒ݂ܸܽ݃݀ܵܽܽ݅ ܔܻܵ ܝ. ܐ. ܜܻܾܰܺܰܺܲ݃(외무장관 사조노프가 1914년 10월 13일자로 내무장관 마끌라꼬프에게 보낸 편지, 뻬쩨르부르크 중앙국립역사문서보관국 소장)

즉 러시아 정부의 대일친선입장에 따라 러시아 지역의 한인 독립운동은 탄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교보 간행의 중심인물인 이강, 정재관 등 7명이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 투옥되는

) 김정주, セ조선통치사료ソ 7, 한국사료연구소, 1971, p. 619

한편 정교보도 폐간당하였다.

) 김정주, セ조선통치사료ソ 10, p. 3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15년 3월 11자로 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セ도산안창호자료ソ(1), p. 4

정교보의 발행 부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배포지역은 러시아의 주요 지역과 중국, 만주, 일본, 미국본토와 하와이, 멕시코 등지였다.

) 멕시코에서 이 잡지를 받아 본 멕시코 메리다 지방회장 이종오, 서기 김기창 등은 1912년 7월 7일자로 편지를 보내 이것이 1912년 9월 1일에 발행된 제6호 기서에 <묵국 동포의 서신>이라 하여 게재되기도 하였다.

정교보사에서는 이들 각 지역에 지사를 설치하고 책임자를 선정하였는데 이를 보면 러시아지역은 연추 최재형, 항산 이용진, 묵허우 최원국, 연다우재 최인삼, 지신허 박표돌이, 블라지보스또크 황공도, 소왕령 한창근, 하바로브스크 이인백, 블개미스크 이원해, 미령 김능환, 수청 박영갑, 원사, 리프 한종원, 이만 예수교당, 이르꾸쯔크 장봉일, 적포 임윤여, 토음 최경석, 철야빈 신석기, 감차스크 박인섭 등이었다. 그리고 만주지역은 목릉 황경면, 하얼빈 동흥학교, 해임 지방회, 연길부 박정래 등이며, 일본은 동경,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당, 하와이 한인교당, 멕시코는 유카탄 지방회 등이었다.

정교보의 재정은 처음에 동포들이 갹출한 돈으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그 돈은 큰 것이 되지 못하여 폐간될 우려가 항상 있었다. 이에 정교보사에서는 주식회사의 형태로 주금을 모금하고자 하였는데 처음에는 총고금 3천루블을 삼백고, 매고 10루블로 하였다.

) 정교보 창간호 정교보발행규칙강령, 한편 정교보 창간호 및 2호에 실린 본사특별광고에는 총자본 200주라고 하고, 매주는 러시아돈 10루불로 한다고 하였다.

정교보의 재원으로 각지 동포의 기부금도 들 수 있다. 정교보에서는 연조하는 사람의 이름과 금액을 정교보에 게재하여 감사하다는 표시와 영수한 증거가 될 수 있게 하였다.

) 정교보 창간호 정교보발행규칙강령

그리하여 정교보에는 이들 기부자의 명단과 금액이 상세히 적혀 있다. 여기에 의하면 정교보의 간행을 위하여 우름금광, 치따, 주면, 치소바야, 얄로스크 금광 등 각 지역 동포들에 의해 기부금이 많이 제공되었다.

또한 정교보사에서는 1912년 11월 17일 밤에 사원회를 개최하고 각 지역에 파견되어 자금을 모으는 역할을 담당하는 권의부를 설치하고, 부장에 김수려, 부부장에 방낙원, 위원에 정달삼 외 13명을 임명하였다.

) 정교보 7호, pp. 31-32

그리고 1913년에 개최된 대의회에서는 권유위원으로 김낙준 외 24명을 증선하였다.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セ도산안창호자료ソ(3), p. 112

특히 이재한의 경우 각처에서 거액의 의연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 정교보 8호 권유위원의 열심

일부의 정교보의 재정은 잡지 대금과 잡지의 광고료로 충당하였다. 본보대금은 매월 러시아돈 30까뻬이까, 육개월 선금 1루블 60까뻬이까, 일년선금 3루블로 하였으며,

) 정교보 창간호 정교보발행규칙강령

광고요금은 이십자 한줄에 10까뻬이까, 사분의 일 면에 60까뻬이까, 반면에 1루블, 한면 전체에 1루블 50까뻬이까 등이었다.

) 정교보 창간호 광고요금, p.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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