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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의 성립

1910년 2월 10일 미주의 국민회에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大同保國會가 참여하게 됨에 따라

) 최기영, ゛구한말 미주의 대동보국회에 대한 일고찰ゝ, セ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논총ソ, 1992, p. 1343 국민회는 해체되고 1910년 5월 10일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단체는 미주는 물론 멕시코, 러시아 등지에도 조직을 갖춘 해외한인들의 자치기관으로서 또한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 윤병석, 앞의 논문, p. 296. 이처럼 국민회가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하자 러시아 지역의 국민회 지부도 대한인국민회의 원동지부가 되었다. 한편 이러한 때에 안창호, 李鍾浩, 申采浩 등이 중국 靑島에서 회담을 개최한 후 블라지보스또크에 도착하였다. 이들의 도착은 러시아 지역 국민회의 활동과 러시아 지역 한인독립운동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게 된다.

1. 안창호의 블라지보스또크 도착과 활동

국내에서 新民會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안창호, 李甲, 李東輝, 이종호 등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伊藤博文을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되자 일제히 그 배후 협의로 검거되었다.

) 주요한편, セ안도산전서ソ, 샘터사, 1967, p. 108. 1909년 12월 그들은 무협의로 풀려났으나

) 위와 같음 국내에서는 일제의 감시로 더이상 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1910년 4월 국내를 탈출,

) 이정희, セ아버님 추정 이갑ソ, 인물연구소, 1981, p. 161. 1910년 7월 중국 청도에 모여 앞으로의 운동 계획에 대하여 논의하게 되었다.

) 곽림대, ゛안도산ゝ, セ한국학연구ソ4,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2, p. 211. 그 때 참여한 주요 인물로는 안창호, 李甲, 金羲善, 신채호, 이종호, 李鍾萬, 柳東悅, 金志侃, 이강 등을 들 수 있다.

) 주요한, セ속편 도산안창호ソ, 삼협문화사, 1954, p. 144. 이 회의에서 그들은 이종호가 3.000달러의 자금을 내기로 하고 吉林省 密山縣의 땅 약 사방 십리 가량을 사서 개간하여 자급 자족하는 동시에 사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자고 결의하였다.

) 주요한, セ안도산전서ソ, pp. 114-115; 주요한, セ속편 도산안창호ソ, p. 144. 그리고 그곳에서 유동열, 이갑, 김희선 등이 군대교련, 신채호가 일반교양, 김지간이 토지 경영을 책임지기로 하였다.

) 주요한, セ안도산전서ソ, pp. 114-115.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들은 우선 吉林으로 가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일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블라지보스또크를 거쳐 길림으로 가는 길을 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선 일차 목적지인 블라지보스또크로 향하였던 것이다.

) 주요한, セ속편 도산안창호ソ, p. 144.

안창호는 1910년 7월 경 블라지보스또크에 도착하였다. 그는 여기서 먼저 도착한 이갑, 이강 등을 만났다. 그리고 1908년 3월부터 그곳에서 기반을 잡고 있던 이강의 집에 머물면서 길림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 곽림대, 앞의 책, p. 208. 그러던 차에 1910년 8월 29일 망국 소식을 접하였다. 그런데다가 동시에 이종호가 농지 개척에 투자할 것을 주저하기 시작하였다.

) 주요한, セ안도산전서ソ, p. 117. 이점은 앞으로의 운동계획에 큰 차질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밀산지역 땅의 구입비용을 이종호가 내기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종호가 이를 거절한다면 길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종호가 계획을 변경한데는 尹海, 金立(金翼瑢) 등 러시아지역에 살고 있는 함경도 출신들이 이를 반대하였기 飁문이었다. 그들은 이종호에게 이곳 러시아 지역에는 당신과 같은 함경도 사람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구태여 가깝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밀산현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겠느냐고 설득하였다 한다.

) 주요한, セ속편도산안창호ソ, pp. 147-148. 당시 함경도 인사들은 해삼위 개척리에서 咸北會를 조직하고 비밀히 회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 대동공보 1910년 6월 23일 잡보, 1911년에 이종호는 함북회 산하의 함북청년회를 이끌었고,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권업회를 조직하였다고 한다(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1911년 6월 17일자로 백원보가 안창호, 이갑에게 보낸편지ゝ, セ도산안창호자료집ソ(1)(이하 안1로 약함), 1990, p. 120.)

이에 이종호는 안창호 등과 결별하고 함경도 출신 인물들과 새로운 운동을 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안창호가 중심이 된 국민회 계열 즉 평안도파와 이종호 등이 중심이 된 함경도 계열은 대립 국면을 맞게 된다. 길림계획이 실패되자 안창호는 미국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바로 미국으로 출발할 수 없었다. 여비가 없었던 것이다. 이종호에게 제공받은 여비가 있었으나 그와 아주 단절한다는 의미에서 이종호에게 돈을 모두 돌려주었던 것이다.

) 곽림대, 앞의 책, p. 209.

안창호는 미국에서 여비가 도착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즉, 1911년 봄까지 러시아와 만주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첫째, 안창호는 러시아 각지를 시찰하였다. 아울러 한국인이 많이 사는 만주 穆陵縣 八面通에 가서 안중근의 가족을 만나기도 하고 그곳을 살펴보기도 하였다.

) 주요한, セ안도산전서ソ, p. 119.

둘째, 안창호는 각지의 교회와 학교에서 연설회를 개최하고 사람들의 단결과 실업의 장려를 호소하였다.

) 김정주, セ조선통치사료ソ 7, 한국사료연구소, 1971, p. 614. 또한 慈善共濟會를 조직,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 단체는 1910년 12월 18일 블라지보스또크 거주 주요 한인 약 30명이 모인 가운데 창립협의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위원장과 위원을 선임하였는데, 위원장에는 金治甫, 위원에는 안창호, 金秉學, 白元甫, 張景根, 咸東哲, 金成元, 金顯土, 金奎涉, 高尙俊, 趙昌浩, 李尙雲, 黃公道 등이었다.

) 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セ明治四十五年 六月調 露領沿海州移住鮮人の狀態ソ, p. 109.

자선공제회에서 안창호는 취지기초위원으로, 한형권은 규칙 기초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안창호가 당시 작성한 章程 초고가 독립기념관에서 편찬한 セ도산안창호자료집ソ(3) pp. 52-101에 남아 있는데, 그 중 PP. 72-73에 수록되어 있는 공제회 장정 제1장 총칙 제2조에 보이는 宗指에서는,

본회 종지는 아령에 주재하는 아동포가 親愛均和하여 환난을 相求하며 과실을 相規하고 아민족의 敎化와 경제를 개량 진보하여 優美한 지경에 도달케 하기로 勉力함

이라고 하여, 이 단체가 재러동포들의 교화와 경제를 강조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셋째, 안창호는 기독청년회 청년들에게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 단체의 중심인물은 러시아에 귀화한 한인들이었는데, 안창호, 李甲, 이강, 유동열, 김치보, 정재관, 김성무, 兪鎭律, 이종호, 김희선 등 국민회 관계 인사들이 찬성원이 되어

)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 앞의 책, pp. 110-111. ⧚ 단체를 후원하였다.

안창호 등 대한인국민회 계통의 인물들의 이와같은 활동은 대한인국민회 세력을 이곳에 확장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이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 연흑룡주 헌병 사령관 미리코프는 그들을 감시하였다. 러시아 당국은 국민회 계통 인물들이 미국에 가서 활동했던 사람들이므로 帝政下에 있는 재러동포들에게 미국의 자유로운 생활 상태를 선전하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 주요한, セ속편 도산안창호ソ, pp. 146-147. 또한 당시 미국과 러시아가 만주 등 동양지역의 이권과 관련하여 경쟁을 하고 있었으므로,

) 신승권, ゛러일전쟁 이후 제정러시아의 대한정책ゝ, セ한민족독립운동사ソ6, 국사편찬위원회, 1989, p. 291. 더욱 두려워 하였던 것이다.

) 주요한, セ속편 도산안창호ソ, pp. 146-147. 뿐만 아니라 당시 러시아의 국교가 러시아정교임에도 불구하고 국민회 계통 인물들이 기독교를 전교하고 다녔다. 즉 국민회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강은 블라지보스또크에서 성경공부를 동포들과 함께 하며 한인들 사이에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에 블라지보스또크 한 곳에서만 기독교 신자가 100여명에 달하게 되었다.

) 미국 상항한인감리교회당, セ대도ソ 1909년 9월 20일자 교회소식 또한 이들 신도들이 예배당의 설립과 부지 구입을 위해 낸 헌금이 650원

) 여기서 원은 루불을 의미한다. 그리고 앞으로 언급될 で전と은 코펙을 의미한다. 이나 되었는데, 이들 신도 가운데에는 이 지역의 유지인 이상운, 차석보, 구례선, 최봉준, 최만학, 윤능효, 고상준, 朴仁燁, 차석보, 정재관, 이상설, 이동휘 등도 포함되었다.

) 대동공보 1910년 1월 2일 잡보

이처럼 기독교가 급속도로 전파되자 러시아 당국에서는 체재 안정 차원에서 이들의 행동을 주시하는 한편 한국인들이 러시아정교를 믿도록 교화하는 선교단을 조직하는 등 대책마련에 부심하였다.

) 아무르강연안지역 장관각하귀하 1914년 1월 29일자(러시아 톰스크 문서보관소 소장)

한편 안창호 등 미국에서 온 국민회계통 인물들의 활동은 일부 재러한인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우선 일찍부터 러시아 지역에 거주하여 토착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함경도파의 반발을 들 수 있다. 이 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崔才亨, 최만학, 이상운, 김니꼴라이, 全(田)義根, 김규섭, 한형권, 오와시리, 이종호, 金秉學, 嚴仁燮, 金振祥, 金翼瑢, 趙璋元, 李春植, 趙昌浩, 洪範圖 등을 들 수 있다.

)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 앞의 책, p. 169. 그들은 안창호 등과 활동하고자 했던 이종호를 함경도파에 흡수,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양파는 세력 확장과정에서 충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함경도파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위하여 러시아로 온 이동세력인 京城派 또는 京派라고 불리우는 서울, 기호세력 즉 서울파를

) 앞의 책, p. 169.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울파와 평안도파는 당시 서울파인 정순만의 평안도파 양성춘 살해사건으로 대립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 대동공보 1910년 4월 28일 당시 서울파의 중심인물로는 이상설, 金學萬, 柳麟錫, 김현토, 李範錫, 尹逸柄, 李範允 등을 들 수 있는데

)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 앞의 책, p. 169. 그 중심인물인 이상설은

) 위와 같음. 정재관과 함께 국민회 파견원으로 러시아에 온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로 온 이후로 대한인국민회가 공화정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정재관과 정치이념상 의견을 달리하여 대립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 이광수, セ나의 고백ソ, pp. 89-90.

한편 안창호 등 국민회 계열은 운동 방법론에 있어서도 의병파 등과 대립을 보이게 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된 후 서울파인 이범윤 등 의병파들은 동년 9월 러시아 당국에 의해 이르꾸쯔크로 유배를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1911년 5월 풀려나 다시 블라지보스또크로 돌아왔다.

) 박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 ゛국권피탈 전후시기 재소한인의 항일투쟁ゝ, セ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논총ソ, 1992, pp. 1080-1081. 그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즉각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민회 계통은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양파간에 알력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르꾸쯔크에 돌아온 이범윤등은 이들에 대하여 위험한 행동을 가하고자 하였다.

) ゛1911년 8월 7일자로 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안(1), pp. 10-11; ゛1911년 7월 25일자로 이강, 정재관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안(1), pp. 12-13. 이처럼 연해주 재러한인 사회의 함경도파, 서울파, 의병파에 의해 소외 당한 평안도, 계몽운동계열인 국민회계열은 러시아측으로부터도 기독교 전도 문제와 관련 주시를 받게 됨에 따라 더이상 연흑룡주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2. 국민회계열의 치따로의 이동

이종호를 중심으로 한 함경도파는 더욱 국민회계통에 압력을 가하였다. 우선 국민회의 중심인물인 안창호, 정재관, 이강, 김성무 등은 정순만을 살해한 사건의 교사자로 법정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평안도파와 서울파의 대립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즉 서울파인 정순만이 평안도파인 양성춘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 대동공보 1910년 4월 24일 양씨의 피살샹보 1911년 6월 21일 양성춘의 형 楊得春과 양성춘의 미망인이 공모하여 정순만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 신한민보 1911년 7월 26일 잡보, 1911년 8월 9일 원동소식. 정순만이 양성춘을 살해한 죄로 몇 달간 금고처분을 받은 후

) 신한민보 1911년 7월 26일 잡보 1911년 2월 7일 출옥하였을 때 이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 신한민보 1911년 3월 15일 원동소식 정순만이 양성춘을 살해할 당시 양성춘은 이강, 정재관, 김성무 등 평안도파와 같은 입장이었으므로

) 대동공보 1910년 4월 24일 양씨피살샹보 양득춘이 정순만을 살해하자 안창호, 정재관, 이강, 김성무 등 대한인국민회 인물들이 양씨를 교사하여 살해했을 것으로 생각하여 러시아 당국에서는 이들 4인에게 구인장을 발부하였던 것이다. 이일로 정재관, 이강 등은 더 이상 블라지보스또크에 있을 수 없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 ゛1911년 8월 7일자로 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안(1), pp. 10-11.

이에 더하여 안창호가 블라지보스또크를 떠난 후 이종호는 서울파 이상설과 연합하여 엄인섭, 金益庸 등을 내세워 평안도파를 공격하였다.

) 위와 같음. 그들은 먼저 라지보스또크에 다니러 온 대한인국민회의 중심인물인 김성무를 구타하였다.

) ゛1911년 음력 7월 18일자로 황공도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안(1), p. 372. 이유는 김성무가 장정 2인을 대동하고 이종호의 돈을 강제로 빼앗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 ゛1911년 8월 7일자로 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안(1), pp. 10-11.

白元甫 역시 평안도파라는 이유로 그들로부터 구타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 ゛1911년 음력 7월 18일자로 황공도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안(1), p. 372. 블라지보스또크항 헌병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ぢ遊衣遊食하는 不好人っ이란 죄목으로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 백원보는 1911년 6월 16일(러시아력) 석방되었다.゛1911년 6월 17일자로 백원보가 안창호, 이갑에게 보낸 편지ゝ, 안(1), p. 118. 또한 안창호에 대하여는 일대 협잡군이라고 각처에 소문을 퍼드려 악담하였으며, 러시아정교회 전도사인 국민회원 황공도에 대하여는 소왕령에서 음한 행동을 하다가 쫏겨났고, 또 블라지보스또크에서도 음란한 행동을 하고 있었으므로 교회에 두지 못할 인물이라고 비난하였다.

) ゛1911년 음력 7월 18일자로 황공도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안(1), p. 372.

또한 이종호는 대동공보 이후 勤業會에서 1910년 6월 6일부터 블라지워스크에서 발행하고 있던 大洋報를 자신의 주장대로 하고자 하였다. 이에 편집인인 평안도파 유진률과의 대립으로 신문이 수삼주 정간되기도 하였다.

) 앞의 편지, pp. 372-373. 이에 유진률은 당시 상황을 안창호에게 알리는 등 이종호를 규탄하였다.

) ゛1911년 8월 23일자로 유진률이 안창호에게 보낸편지ゝ, 안(3), pp. 18-21; 안(1), pp. 378-382.

그러나 대양보를 둘러싼 평안도파와 함경도파의 대립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당시 대양보사의 재정이 고갈되자 신문사에서는 신문이 정간되는 것보다 이종호의 힘을 얻어 신문을 간행하는 편이 낫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근업회가 권업회와 합하고 신문사도 이종호의 소유가 되었다.

) ゛1911년 6월 17일자로 백원보가 안창호와 이갑에게 보낸 편지ゝ, 안(1), p. 121. 이에 유진률이 안창호에게 연락, 도움을 호소하여 미주에 있는 안창호, 황사용, 최정익 등이 1911년 11월 15일자로 <대양보를 위하여 유지제군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발표

) 독립기념관 소장 , 대양보의 간행에 연조금을 다소 불문하고 제공할 것을 호소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또한 이종호는 당시의 민회의 김병학, 김학만 등과 힘을 합쳐 사방에 사람을 보내어 국민회의 신의를 떨어뜨리고 미주의 유력자에게 속지 말라고 선전하였다.

) ゛1911년 음력 7월 18일자로 황공도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안(1), p. 373.

이처럼 해삼위에서 이종호, 이상설 등 함경도파와 서울파에게 압박을 받고 있던 이강, 정재관 등은 혹시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하여 그곳을 떠나고자 하였다. 더군다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순만 사건으로 법정에 출두해야할 입장이었으므로 더욱 불안하였다.

) ゛1911년 8월 7일자로 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안(1), pp. 10-11; 1911년 음력 7월 18일자로 황공도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안(1), p. 375. ⧚이에 이강, 정재관 등은 하바로브스크와 불개미스크를 경유하여 1911년 9월 10일 자바이칼 지역인 치따로 이동하였다.

) ゛1911년 9월 10일자로 백원보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안(1), p. 157; 1911년 9월 12일자로 이강, 정재관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안(1), p. 14. 그것이 치따로 이동한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 치따는 시베리아 중원에 있는 자바이칼주의 수부로서 행정의 중심지이며, 거주 한인 수도 120-130명이나 되었다.

) 신한민보 1914년 4월 9일 원동소식 동포들은 농업, 상업, 담배말이, 세탁소 등에 종사하였는데, 농업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 중 9/10는 감자 농사이며, 1/10은 배추농사이다.이들 농업에 종사하는 인물들은 많은 농토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를 보면, 문윤함 15일경, 최기암, 엄태열 10일경, 지문오 9일경, 김병칠 7일경, 이준하, 현명진 8일경, 고성삼, 동치언 7일경, 장돈훈장 6일경, 허여옥 5일경, 문중삼 5일경, 조기옥 5일경, 박성천 4일반경, 원치화 4일경, 김두환 4일경, 박명호 4일경, 신우정 4일경, 한윤홍 4일경, 서성범, 권화순 4일경, 전도여 4일경, 정기철 3일경, 남민섭 3일경, 태용서 3일경, 방락원 3일경, 김화순 3일경, 강희준 3일경, 손봉룡 2일반경, 남득련 2일경, 김수업 2일경, 박장렬 2일경, 박재림 2일경, 박근용 2일경, 신석남 2일경, 김선덜 2일경, 김경삼 1일반경, 문중도 1일반경, 지숙영 1일반경 등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업에 종사하는 인물로는 박집초, 임동선, 강정송, 최재언, 강희준, 최기암, 윤봉은 등을 들 수 있는데 윤봉은이 요리집을 운영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잡화점을 운영하였다. 잡화점의 자본은 200원에서 400-500원정도였다. 수입이 좋은 권연 제조 즉 담배말이업에 종사하는 인물로는 석도현, 김덕신, 마도하, 이재한, 김신, 강재선, 김수용, 김순팔, 김순창, 전원식, 손귀현, 심만실, 김정삼, 김봉오, 방기선, 남병규, 김승길, 김주원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1,000개를 말경우 30전내지 35전의 수입을 얻었으며, 하루에 평균 3,000-6,000개 정도를 말 수 있었다고 한다. 세탁소를 운영하는 인물로는 민언필을 들 수 있는데 2,3명의 고용인을 두고 한다고 한다.

) 대한인졍교보 5호 잡보 pp. 28-30 이러한 치따 지역의 인적, 물적 기반은 대한인국민회 계열이 운동을 펼쳐나가는데 좋은 기반을 제공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치따에는 1909년경부터 대한인국민회 계열인 국민회가 설치되어 있었다.

) 신한민보 1909년 12월 22일 원동소식 1910년말 당시 치따 국민회의 주요 간부로는 회장 문윤함, 부회장 고성삼, 총무 류웅륭, 서시 박명호, 세무 김춘택, 학무 연봉순, 법무 서성범, 구제 석도현, 평의원 박재림, 강희준, 김현오, 엄태열, 태도여, 박영실, 신수길, 민언필, 방덕보, 대의원 주형칠, 김현보 등을 들 수 있다.

) 신한민보 1911년 2월 15일 회보

셋째, 치따의 한국인들은 일찍이 민족의식이 강하였다. 그들은 1909년 국민회가 조직된 후 학교를 설립,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것이다.

) 신한민보 1914년 4월 9일 원동소식; 대동공보 1910년 8월 28일 잡보 또한 1909년 6월 24일에는 문제언, 남창석, 김니꼴라이, 박대선, 서성범 등의 명의로 대동공보에 기서를 보내어 대동공보에 매달 10원을 보내겠다고 통고하였다.

) 대동공보 1909년 7월 4일 기서

넷째, 국민회의 대중적인 기반이 조성되어 있었다. 1911년 안창호가 미국으로 가기 위해 유럽으로 가는 길에 치따를 방문, 이곳의 동포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 곽림대, 앞의 책, p. 211.

한편 1911년 9월 치따에 도착한 이강, 정재관 등은 동년 10월 이곳에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를 설치하였다.

) 김원용, 앞의 책, p. 111. 그리고 동년 12월에 각 지방회에 통고문을 발송하였다.

) ゛1911년 12월 20일자로 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안(1), p. 51. 이에 1912년 2월 15일 미주의 중앙총회에서는 시베리아총회 임시사무소를 치따에 두고 정재관, 이강 등으로 하여금 정식총회 조직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 신한민보 1912년 3월 18일. 1913년에도 미주 대한인국민회 본부에서는 시베리아총회를 정식으로 인준하고 있지 않다. 이에 이강은 정식으로 인준해 주지 않는다면 독립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1913년 1월 15일자로 ゛이강이 최정익과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ゝ, 안(1), p. 70)

창립 당시 시베리아총회의 주요간부는 회장 朴執初, 부회장 太龍西(瑞), 서기 卓公圭, 극동전권위원 이강 등이었다.

)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 セ대정원년 11월조 재외조선인결사단체상황ソ(セ민족문화논총ソ5,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3) 1913년에는 부회장 金水麗, 총무 태용서, 재무 高成三, 서기 金鐸, 權化純, 원동위원 이강 등이었으며,

) ゛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 제1회대의회 의결사항문서ゝ(이하 1차대의회문서로 약함), 안(3), p. 103. 1914년에는 회장 김수려, 부회장 권화순, 법무 朴(林)允禮, 재무 태용서, 학무 金南益, 외교 蔡明澤, 서기 金鐸, 구제원 金若燮(天), 方德甫, 朴如一, 朴南根 등이었다.

) ゛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 제2회대의회 의결사항문서ゝ(이하 2차대의회문서로 약함), 안(3), pp. 114-115. 1914년에 개최된 2차 대의회에서 그 이후에 일할 임원 후보자를 선출하였으나 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시베리아총회가 해체됨에 따라 취임하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당시 시베리아총회 관할 지방회는 치따, 하바로브스크, 미영, 상우진, 흑하, 이르꾸쯔크, 馱스크, 철야빈, 거라쓰나엘 등 9개지방회였다.

) 신한민보 1912년 3월 18일 회보 시베리아 총회에서는 대한인국민회 수청총회와 중앙총회가 관할하고 있지 않은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 1911년 10월 20일 수청일대에 있는 12개 지회가 연합하여 대한인국민회 수청지방총회가 결성되었다.(신한민보 1911. 11.1. 회보, 신한민보 1911. 8. 16. 회보) 수청지방회에 속한 지회는 중흥, 홍석동, 신영, 석탄광, 승지, 황구동, 신풍, 십여촌, 진영, 우지미, 만춘, 동호 등이었다. 한편 미주의 중앙총회에서는 별음스크, 오소리만, 소왕령, 고려, 주면 등 5개지방을 임시로 관할하고 있었다.(신한민보 1912. 3. 18 회보) 그런데 시베리아총회 세력은 날로 발전하여 1913년 5월 치타에서 개최된 제1차 대의회 시기에는 치따, 이르꾸쯔크, 상우진, 우름(盃扶), 어인, 이그낫치, 별리미(별님), 주면, 예가절불, 馱스크, 흑하, 나지문(羅進物), 안다락간, 적포, 철야빈, 혜현 등 16개 지방회로 확장되었으며,

) ゛제1회대의회문서ゝ, 안(3), p. 103. 러시아 지명을 한자로 표기한 것 중 당시 재러한인들이 한글로 사용한 것은 대한인정교보에 의거하여 한글로 사용하였음. 배목은 우름으로, 배호사는 울우사로, 안력산은 알렉산드롭스크 등이 그예이다. 1914년 6월에 개최된 제2차 대의회 시기에는 수랍스크(수납), 나시면, 알렉산드로브크(ܐܻܴܾܵܺ݁ܰܽ݀ܲ݁ܺ), 특례진, 악시, 옴스크, 신인대, 울우사(盃乎社) 등 21개 지방회로 더욱 그 세력이 불어났다.

) ゛2차대의회 문서ゝ, 안(3), p. 114.

3) 대의원회의 개최

1909년 2월 1일 제정되어 1912년 12월 1일 개정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발행, 대한인국민회 헌장

) 대한인국민회 헌장(미국상항, 신한민보사, 1912, 독립기념관 소장), 이 헌장은 모두 9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장은 총칙, 2장은 중앙총회, 3장은 지방총회, 4장은 지방회, 5장은 임원의 권한, 6장은 선거와 임기, 7장은 의무와 권리, 8장은 재정, 9장은 벌칙 등으로 규정되어 있다. 3장 지방총회 부분에는 대의원회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지방총회는 대의원회와 임원회 두 종류로 나누며, 그 중 대의원회는 지방회가 선출한 대의원 각 1인으로, 임원회는 지방총회의 각 임원으로 조직된다고 되어 있다.

) 대한인국민회 헌장 3장 17조 그리고 대의원회의 의결하는 사항은 1. 헌장범위안에 지방총회의 자치규정, 2. 임원선정, 3. 예산 결산과 예산의 지출, 4. 전년도의 성적조사와 내년도 요무의 입안, 5. 임원의 사무 처리 상에 부정한 점이 있는 때에는 질문하거나 혹 처벌하는 것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 대한인국민회 헌장 3장 18조

한편 대의원회는 정기회의와 임시회의로 나누며, 정기회의는 매년 12월 15일부터 시작하여 그 이듬해 1월 20일까지 함을 원칙으로 하며, 일의 다과에 따라 그 기한을 조절할 수 있다.

) 대한인국민회 헌장 3장 20조 아울러 대의원 회의 소집은 지방총회장이 행하며,

) 대한인국민회 헌장 3장 22조 대의원 회의 의장은 지방총회의 부회장이 겸한다고 되어 있다.

) 대한인국민회 헌장 3장 24조

시베리아총회에서는 대한인국민회 헌장 규정에 따라 1913년, 1914년에 각각 1회씩 2차에 걸쳐 치따에서 대의원회의를 개최하였다. 1차 대의원회의부터 살펴보면, 시베리아 총회에서는 1913년 5월 28일 하오 3시에 치따에서 대의원 회의를 개최하여

) ゛1차대의회문서ゝ, 안(3), p. 103. 동⧚ 6월 7일 상오 10시까지 13일 동안 회의를 진행하였다.

) ゛1차대의회문서ゝ, 안(3), p. 108. 당시 이 회의를 주최한 주요인물은 의장 김수려, 총무 태용서, 재무 고성삼, 서기 권화순, 원동위원 이강, 대표원 崔廣 등이었다.

) ゛1차대의회문서ゝ, 안(3), p. 103.

이들 총회의 주요 간부 가운데 김수려만 흑하 소속이고,

) 신한민보 1911년 7월 19일 회보; 대한인국민회 헌정 3장 24조에 근거해 볼 때 김수려는 당시 시베리아지방총회 부회장이었던 것 같다. 물른 인물들은 모두 치따지방회에서 활동하고 있던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대의원 회의는 치따지방회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대의원 회의에는 러시아 각 지역 특히 자바이칼 16개 지역 지방회에서 대의원을 직접 파견하거나 또는 그 권리를 위임하고 있다.

) 1차대의원 회의에는 시베리아총회 조직시 참여했던 9개 지방회 중 6개지방회만 참여하고 있다. 주면 등 10개 지방회는 새로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 지방회는 총회 조직시에는 미주 중앙총회 관할이었던 것들이다. 치따 대의원 馬圖河, 이르꾸쯔크 대의원 金?賢, 상우진 대의원 金鉉甫, 우름 대의원 金洛俊, 어인 대의원 金亨甫, 이그낫치 대의원 金鐸, 韓成周, 별리미 대의원 李應俊, 주면과 예가절불 대의원 姜錫允, 馱스크 대의원 金秉旭, 흑하, 나지문, 안다락간 대의원 대리 김수려, 적포 대의원 대리 이강, 철야빈 대의원 대리 金晩植, 혜현 대의원 대리 김낙준 등이 그들이며, 그 밖에 치따지방회장 文允咸, 치따지방 부회장 姜希俊 그리고 동 회원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 ゛1차대의회문서ゝ, 안(3), p. 103.

1차 대의원회의에서는 대한인국민회 헌장 규정에 따라 대의원회 의결 사항을 진행하였다. 우선 시베리아총회의 자치규정을 제정하기로 하고, 최광, 이강, 김탁 등 3인을 기초위원으로 선정, 위촉하였다.

) ゛1차대의회문서ゝ, 안(3), p. 111. 그것은 헌장 19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방총회는 자치규정을 갖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에는 시베리아총회의 임원을 선출하였다. 1914년도 총회장 후보자로 김수려, 金河一 등을 그리고 부회장 후보로 마도하, 권화순 등을 선정하였던 것이다.

) ゛1차대의회문서ゝ, 안(3), pp. 107-108. 이외에 대의원 회의에서는 예산결산과 예산의 지출, 전년도의 성적 조사, 차기 연도의 계획안의 입안 등을 다루었다.

) ゛1차대의회문서ゝ, 안(3), pp. 102-113.

2차 대의원 회의는 1914년 6월 15일 상오 8시에 시작하여

) ゛2차대의회문서, 안(3), p. 108. 동월 20일 하오 3시에 폐회식을 거행하였다.

) ゛2차대의회문서ゝ, 안(3), p. 120. 이 회의에는 의장 권화순, 신임총회장 김수려, 전년도 총무 태용서, 전년도 재무 고성삼, 전년도 서기 김택, 원동위원 이강 등 외에 자바이칼 21개 지역에서 대의원들이 참석하였다.

) 대한인졍교보 11호, p. 20에서는 21개 지역에서 대표가 파견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치따 宋仁昊, 울우사 李星老, 흑하, 나지문, 안다락간 金若天, 수랍스크 金順八, 신인대 金亨甫, 나시면, 알렉산드롭스크 金仁賢, 특진례 金應瑞, 악시 朴明浩, 이르꾸쯔크 金壽一, 적포, 주면 , 馱스크, 呂加郁, 별리미, 옴스크 金河一, 우름 裵尙殷, 상우진 金東灐 등이 그들이며, 그밖에 치따 지방회 임원과 회원들이 참석하였다.

) ゛2차대의회문서ゝ, 안(3), p. 114.

한편 2차 대의원회의에는 1차 대의원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지방회에서도 참석하였다. 수랍스크, 악시, 여가욱, 옴스크 등은 그러한 경우이다. 2차 회의에서도 역시 1차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임원을 선출하였는데, 회장 김수려, 총무 고성삼, 법무 朴(林)允禮, 재무 태용서, 학무 金南益, 외교 蔡明澤, 서기 김탁, 구제원 金若天, 方德甫, 朴如一, 구제원 朴南根 등이 그들이다.

) ゛2차대의회문서ゝ, 안(3), pp. 114-115. 임원진을 1913년과 비교해보면 회장은 김수려가 그대로 유임되었고, 재무와 총무는 자리바꿈하였다. 그 외에 법무, 재무, 학무, 외교, 구제원 등을 각각 임명하여 총회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임원 취임식은 1914년 6월 임시 주석 金東瀅의 주도하에 이강이 기도를 인도하고 창가단이 국가를 부르는 가운데 엄숙히 진행되었다. 당시의 숙연한 분위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총회장이 서약문을 낭독하고 친히 서명할 때 左手無名指를 끊어 손가락으로 붓을 대신하며 먹을 사용하지 않는다. 서약문에 이르기를 일반회원이 맡기심을 받아 감히 총회장 자라로 나아온 바 본회의 거륵하고 존엄한 헌장을 삼가지키며 나의 간절히 사랑하는 동포를 모아 화평한 가운데 단합을 도모하며 공평한 마음과 정직한 주의로 본회의 앞길을 위하여 길이 힘쓰기를 맹세하노라라고 하였다.

) ゛2차대의회문서ゝ, 안(3), pp. 125-126.

또한 본회에서는 차기임원 후보자를 선정하였는데, 총회장 후보자로는 沈光甫, 李瑞奉 등이, 부회장 후보로는 장기룡, 문윤함 등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예산결산과 예산의 지출, 다음해의 계획안 등을 입안하였는 데 이 부분은 다음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한편 제2차 대의원회는 1914년 6월 20일 폐회식을 거행하며, 3차 대의원회의를 기약하였다. 그러나 3차 대의원회는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개최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전시 계엄령으로 시베리아총회도 1915년 5월 해산당하였다.

) 김원용, 앞의 책, pp. 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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