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2010.08.31 14:25

권업회-3.권업신문의 간행과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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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업신문은 권업회의 기관지로서 1912년 4월 22일(러)부터 1914년 8월 30일까지 약 2년반 동안 총 126호가 간행된 한국어 신문이다. 특히 이 신문은 그 기간 동안 러시아 지역에서 간행된 유일한 한인 신문이자 민족지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1914년 5월 5일 권업신문 제2주년 기념호에 실린 사설 <본보챵간뎨二쥬년긔념>에서,

우리한국사鿑의 신문은 엇더한 쥬견과 엇지할 방법을 가지고 진행할가 우리鏅 다 나라업鏅 ꟢셩이라 어대가던지 텬부한인권은 차즐곳이 업고 아모때라도 제나라鿉 찻고야 꿁鿑의 구실을 할지니 고로 우리鏅 국권회복과 민죡주의鿉 우리한국사람마다 가꿑에 품으며 이마에 싹여 자나깨나 이鿉 실행하야 볼작뎡을 할지라 본 신문은 우리민죡을 대표한 긔관으로 이에 목镢하여 이鿉 실행할 슈단으로 탄꿷한 오날은 곳 두돐이 되얏도다

라고 하고 있듯이, 권업신문은 국권회복과 민족주의를 그 간행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러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10만 동포들은 이 신문의 발행에 대하여 큰 기대를 걸고 있었으며, 신문이 간행되자 많은 사람들이 그 간행을 축하하였다. 즉 1912년 5월 26일자에 김종국은 <권업신문을 위폁여>라는 축사를 기고하여,

보기에鏅 륢은듯 폁되 덕도 그보다 더놉폅 덕이 업고 공도 그보다 더 큰 공이 업鏅 것은 신문이라. 그 모양을 보면 불과 조하 한쟝에 镱镱폅 먹뿐이지만은 그향폁鏅 곳에는 눈 먼이가 눈을 뜨고 귀먹은 이가 귀를 뜨고 방안에 안져 만리밖의 일을 알고 오鏉에 잇여 십년후의 일을 알게폁鏅 것은 신문뿐이라. 그런고로 신문이 만흔 나라는 문명폅 나라가 되고 신문이 업鏅 나라는 암매폅 나라가 되鏅 것이로다. 그런韡 한인 루만명 잇鏅 아령디에 신문이 몃몃치냐. 아아 권업신문 너 한아 뿐이로다. 금믁동아 옥믁동아 엇더케 이鿉 잘 키울鏅지 권업신문 너를

라고 하여 권업신문의 간행을 축하하는 한편 신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1912년 6월 16일에는 <꟢열꿷>이, 1913년 6월 16일자에는 <반룡산쇼년>이라는 독자가 <권업신문을 위폁야>라는 축사를 각각 기고하고 있다. 아울러 재러동포들은 권업신문의 의무를 강조하였다. 1912년 5월 26일자에는 <하鏉걁 불>이란 익명의 독자가 <비鏅말>이라는 제목하에,

권업신문아 네가 나왓도다

셩쯡폁기 어려우며 폡산폁기 어려운데셔 네가 나왓도다

깁흔 리샹을 가지며 무거운 쏢임을 지고 네가 나왓도다

오鿡살어라 잘 활동하여라 아마손 하슈试치

라고 하여 권업신문의 간행을 축하하며 그 무거운 책임 또한 잊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재러동포들의 축하속에 간행된 권업신문은 러시아의 도시와 농촌에 살고 있는 동포들뿐만 아니라 금광, 어장 등에서 일하고 있던 노동자 계급에 이르기까지 다수가 구독하는 열성을 보일 정도로 재러동포 사회 전체의 지지를 받던 신문이었다.

권업신문은 또한 당시 해외에서 간행된 몇 안되는 민족지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하여 권업신문은 미주에서 간행되었던 신한민보, 신한국보 등과 함께 항일민족의식을 선도하는 3대 언론의 하나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므로 일제는 이 신문의 국내수입 등을 금지하는 탄압을 가하였다.

권업신문은 이처럼 중요한 신문이었으므로 학계에서도 일찍부터 주목하여 왔다. 그러나 신문이 현존하지 않아 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러시아와의 활발한 학술교류로 권업신문이 국내에 입수되었다. 이에 권업신문에 대하여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본고에서는 권업신문의 간행, 신문사의 참여자들, 신문의 내용 등 에 대하여 밝혀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권업회는 물론 1910년대 연해주지역 재러한인 민족운동의 실상에 보다 가까이 접근해 보고자 한다.

1. 권업신문의 간행

권업회는 1911년 6월 1일 발기한 이후 1911년 7월 3일(러)

) 앞으로 러시아력은 で러と로 약함. 청년근업회와 통합하였다. 당시 청년근업회에서는 1911년 6월 18일부터 대양보를 발행하고 있었고, 사장에 최재형, 주필에 신채호, 총무에 차석보, 발행인 金大奎, 회계 김규섭, 노어번역 유진률, 서기 김만식, 集金係 이춘식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 セ明治四十五年 六月調 露領沿海州移住朝鮮人の狀態ソ(이하 노령이주상태로 약함) pp. 87-88 이에 권업회 발기회에서는 신문부원으로 이종호, 유진률 등을 임명하고 대양보를 권업회의 기관지로서 활용하고자 하였다.

)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 그래서 권업회에서는 대양보사를 칭거우재로부터 신한촌으로 옮기기 위하여 1911년 7월 16일(러)부터 신한촌의 가옥 수리에 착수하였다. 그 이후 7월 26일(러)에 대양보사를 신한촌에 이사하고 신문을 계속발행하였다.

)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

대양보의 체제는 대동공보와 같았고, 한글로 된 4면 신문이었다. 그리고 주 2회 목요일과 일요일에 발간되었다. 신문의 논조는 일본의 한국통치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등 항일적인 기사 일색이었다.

) セ노령이주상태ソ pp. 88-90 대양보는 곧 발행인 겸 편집인에 유진률을 임명하고 7호까지 간행하다가 유진률과 이종호 사이에 의견 충돌이 생겨 휴간하게 되었다. 그 후 의견 조정으로 8월 27일 제 8호를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또 9호는 8월 27일 목요일이 정기 간행일이었으나 2일 늦추어 국치일인 29일에 일제의 조선강점 특집호를 간행하였다. 주요 내용은 항일에 대한 것이었으며, 평소 300부 간행하던 것을 1400부를 간행하여 무료로 배부하였다. 그러나 대양보는 13호를 내고 또 유진률과 이종호간의 의견 대립으로 인해 9월 14일 발행인 겸 편집인 유진률이 사직하기에 이르렀다.

) セ노령이주상태ソ pp. 91

대양보에서는 유진률의 후임으로 러시아인 뽀랴노브스키, 듀꼬프, 빤데레프(ܟܴܻܰܽܵܵܲ) 등 3명을 명예직으로 추천, 임명하고 다시 신문의 간행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9월 17일 밤 약 15000개의 활자를 도난당하여 신문 발간에 차질을 빗어 결국 휴간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 セ노령이주상태ソ p. 91

그러는 가운데 이종호에 의하여 권업회 발기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신문사도 재정문제로 권업회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 같다. 블라지보스또크에서 활동하던 국민회 계열 인물 백원보가 1911년 6월 17일자로 안창호, 이갑 등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근일 이종호가 권업회를 설립한 바 아즉 인허는 無하오나 從此得許도 有하겟다 하는데 其 목적은 농· 상· 공· 학 四業을 실지로 행할 작정이오, 況且 신문사도 최씨네 삼숙질이 기부하겟다는 錢은 사개월 후에 出給된다 風傳이오, 신문사에 재정이 窘渴하야 정지되는 것보다 이종호씨로 합하야 견고케 하는 것이 可하다는 청년제씨의 의론이 유하야 勤業會와 권업회가 합하고 신문사도 이씨의 물이 거의 다된 듯 하외다.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セ도산안창호자료(1)ソ, p. 119.

라고 하고 있다.

그 후 1911년 12월 19일 러시아의 인정하에 공식적으로 블라지보스또크 한민학교 내에서 권업회가 창립되자, 권업회에서는 신문부를 따로 두어 신문 간행의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신문부 총무에 한형권, 부장 겸 주필에 신채호, 부원에 朴東轅, 李瑾鎔 등을 임명하여 신문 간행을 준비하고

) セ노령이주상태ソ p. 94 , 1912년 2월 29일에 뽀랴노브스키, 뽀드스따빈과 듀꼬프를 명에회원으로 입회시키는 한편 신문 발행인을 듀꼬프로 정하고 순무부에 권업신문의 허가를 청원하였다.

)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 아울러 동방학 연구소의 교수로서 한문과 한국어에 능한

) 장지연, 해항일기 1908년 4월 9일자 뽀드스따빈에게 이 작업의 지도 감수를 요청하였다.

) 권업회, 馱스크 문서보관소 소장

1912년 4월 4일(러)에 개최된 1912년 제1회 총회에서는 교육, 종교, 농업권장, 노동소개, 금융 등과 함께 신문 간행을 본년도 사업으로 정하였고, 그리고 동년 4월 7일(러)에 권업신문 인가장을 러시아당국으로부터 접수하였다. 이제 권업신문은 그 간행을 위한 모든 구비조건을 갖추게 되었고, 마침내 1912년 4월 22일(러) 권업신문 제1호를 석판 인쇄로 창간하였다.

)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

권업신문은 순한글로 간행되었으며, 1주일에 1회 일요일에 간행되었다. 편집은 듀꼬프가 담당하였으며, 주필은 대양보의 주필이었던 신채호가 담당하였다.

) 권업신문에는 신채호의 이름이 1912년 9월 8일자까지만 나옴. 그리고 하루에 1400부를 발행하였으며,

) ܜ. ܘ. ܔ. ܘܼ݂ܾܾܿܵ݀ܰ݀݁ܺܵ ܯܾܾܿܽ݁ܺܵ ܓܻܵܽܵ݀ܰ݌ܾܽܵ ܚܾܻܽ݁݃݌݂ܾ݁ܲ No.191. ܳ.

ܒܻܴܸܾ݂ܾܰܲ݁ܺ ܢܻ݄ܵܵ. 550.(외무부, 블라지워스또크 일본영사관에서 1914년 8월 30일자로 연해주 군지사에게 보낸 전문, 馱스크 문서보관소 소장) 당초 발행소는 블라지보스또크 신한촌 하바로브스크 거리 울리짜(ܻܸ݆݃ܰ) 제 10호였으나

) 권업신문 1912년 5월 26일자 , 1912년 12월에 하바로브스크 거리 울리짜 20호로 이전하였다

) 권업신문 1912년 12월 1일자

권업신문은 논설, 각국통신, 전보, 본국통신, 잡보, 단평, 별보, 광고, 기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잡보인데 재러한인의 동향과 러시아 극동지역 러시아 관료 등의 동향 등을 다루고 있다. 광고에서는 일반 광고 외에 권업회의 회보, 권업회 연론부의 광고 등 권업회의 활동에 대한 내용들을 다수 게재하고 있다. 기서는 독자의 투고란인데 권업신문에서는 기서를 신문사에 보낼 때 다음과 같은 사항에 유념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즉 권업신문 1912년 11월 3일자 광고에서 <긔셔폁시鏅이 보시럓>라고 하고, 한문글자를 섞지말고 순전히 국문으로 할 것, 정자로 명확하고 똑똑하게 쓸 것, 의견을 가지고 쓸 것, 한시 7언 5언 등을 쓰지 말 것 등을 강조하고 있다.

그 밖에 권업신문에서는 창간호부터 <뭗국혁명꿁략>을 연재하였으며, 1912년 7월 28일부터는 誌林란에 중국혁명약사를 연재하였다. 그리고 譯載에서는 외국의 중요한 글을 번역하여 연재하였는데, 1912년 6월 23일부터는 <소크라듸쓰 논어>를 연재하였다. 그 연재 이유에 대하여 권업신문 1912년 6월 23일자에서는,

소크라듸쓰는 희랍고韡의 셩인이라. 그 남이 공믁와 거의 한때오, 그뎨믁의 플라또, 쎄노폰은 공문의 안믁, 증믁갓폅 고톄믁라. 셰샹이 어즈럽고 도가 쇠폁야 부졍폅 말과 포악폅 폷실을 폁鏅쟈가 셰상에 가득폑럡 공믁가 나타나셔 뎬리 인도를 말폁셧는韡 이때 희랍에도 인심이 부쿡폁야 돈이나 알고 영예나 알어 셰도가 한심폁게 되며 또 궤변학쟈들이 꿁시이 빈폁말로 일반꿁샹을 혼란케 폑으로 소크라듸쓰가 근심폁야 도덕을 밝히며 실디를 주쟝폁야 믁긔의 몸으로 후세의 모범이 되니라

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1912년 12월 1일에는 文苑이란 제목하에 금강산을 실었으며, 1913년 8월 3일에는 시사만필을, 1913년 10월 5일에는 국문시 두수를, 1913년 12월 27일에는 <졍문부쇼전>을, 1913년 11월 23일에는 <談叢 外史氏 션셩일화>를, 11월 30일에는 歷史譚이란 제목하에 <피득대뎨의 이약기폁나>를, 1914년 1월 11일에는 <셔산대꿁의 소젼>을 , 1월 18일에는 <황진소젼>을, 1월 25일에는 <림뭗량쇼젼>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1914년 2월 1일에는 講壇에서 <화산과 디동>을, 1914년 4월 5일부터 8월 2일까지 강단에서는 <가졍학>을 연재하였다. 또한 1914년 6월 28일부터 뒤바보 계봉우의 <꿁노鿡>를 연재하기 시작하여 8월 23일 폐간일까지 게재하였다. 1914년 7월 12일부터는 <금싸락이>를 8월 2일까지 실었다.

권업신문은 등사판이었기 때문에, 권업신문사에서는 활자를 이용하여 신문을 간행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재러한인들의 힘을 얻어 1914년 2월 15일자 잡보 <활믁鏅 삿소>에,

본항 유지 져씨들이 본샤鿉 위폁야 활믁살일로 의연을 모힌 것은 일반 다아鏅 바 어니와 지난 十一일에 활믁 긔계와 밋 부쇽품 젼부鿉 챠셕보씨의게셔 모다 옴기고 동익일에 매ꏡ계약을 톄결폁야 젼부鿉 一쳔五꟢원에 쟉뎡폁야 챠셕보씨의 소유부분 一쳔一꟢원의 가치鏅 五꟢원만 받고 六꟢원의 치鏅 본샤에 기부폁얏으며 신죵잡지샤 명의로 二꟢원을 최봉쥰씨의 명의로 二꟢원을 본샤에 기부폁얏기 이에 져씨의 셩의鿉 감샤폁노라

라고 하였듯이, 차석보, 최봉준 등의 힘으로 활자를 구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14년 2월 15일 특별사고에,

첫믡 집이 업슴으로 활믁鿉 꿁용평 수 업고 또 활믁鿉 꿁용폁랴면 셜비와 직공의 고용에 다대폅 금전을 요구평 뿐더려 모든 경비鿉 지금 본샤의 형편으로鏅 도뎌히 지츌평슈업꿓기여 이에 진졍을 특고폁오니 본신문을 럡독폁시鏅 여러동포鏅 신문韡금을 쇽히 보鏡시며 또 특히 도아셔 활믁꿁용폁기鿉 간졀히 바라鏁니다.

에서 알 수 있듯이, 권업신문에서는 신문사와 설비, 직공고용 비용 등이 없어서 이를 사용할 수 없으므로 신문대금을 속히 납부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결국 활자를 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설비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권업신문은 폐간될 때까지 계속 등사판일 수 밖에 없었다.

권업신문사에서는 재정을 기부금과 구독료, 광고료 등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기부금은 주로 이종호에게 의지하였다.

) 권업신문 1913년 8월 18일자 역재 <루령거류죠선인문뎨> 가운데 이종호에 대하여 권업신문을 만들어 놓은자라고 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12년의 경우 권업회의 총수입 3,141루블 가운데 이종호가 낸 기부금의 총액은 2,133루블이었던 것이다.

신문사에서는 모자라는 대금을 구독료와 광고료를 통해서 얻고자 적극 추진하였다. 1913년의 경우 신문의 구독자는 930명이었는데,

) 1911년- 1912년까지의 권업회의 보고서 중에서 발췌, 뻬쩨르부르크 중앙국립역사문서보관국 소장. 구독료는 블라지보스또크의 경우 1년 선금이 3 루블, 6개월 선금이 1 루블 60까뻬이까, 3개월 선금이 85까뻬이까, 1개월 선금이 30까뻬이까였다. 그리고 신문 한장에는 8까뻬이까이었다. 그리고 블라지보스또크 이외의 러시아 지역의 경우는 1년에 4루블, 6개월에 2루블 50까뻬이까, 3개월에 1루블 40까뻬이까, 1개월에 50까뻬이까이었다. 또한 외국의 경우는 1년에 5루블, 6개월에 2루블 85까뻬이까, 3개월에 1루블 70까뻬이까, 1개월에 1루블 70까뻬이까이었다.

) 권업신문 1912년 5월 26일자 그러나 국외의 경우는 물론 러시아지역도 구독료는 제대로 수금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1913년의 경우 받지 못한 대금이 5,842루블 46까뻬이까에 이르렀다.

) 권업신문 1914년 2월 8일자

광고료 또한 수입이 되었다. 제1면에는 매일 1항에 10까뻬이까, 제2면에는 매일 1항에 15까뻬이까, 제3면에는 매일 1항에 15까뻬이까, 제4면에는 매일 1항에 5까뻬이까이었다.

) 권업신문 1912년 5월 26일자

권업신문의 재정을 보면 1913년의 경우 신문사의 수입이 3,879루블 90까뻬이까, 지출이 3,850루블 20까뻬이까이었다. 그러나 기존의 적자 때문에 부채가 1,058루블 27까뻬이까이었다.

) 권업신문 1912년 2월 8일자 그리하여 1913년 6월 23일에는 특별사고를 통해 재정이 곤란하므로 대금을 납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같이 권업신문의 재정이 곤란해지자 블라지보스또크의 청년 유지들은 1913년 4월 15일 연극을 공연하여 그 수입금을 권업신문에 기증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 권업신문 1913년 4월 20일자 잡보 <권업회를 위폁야 연극을 논다>

권업신문은 국내와 북간도 지역에도 취재를 위하여 파견원을 보냈으며, 신문을 연해주는 물론 간도, 미주 등지까지도 발송하였다.

) 이명화, ゛노령지방에서의 한인 민족주의 교육운동ゝ, セ한국독립운동사연구ソ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p. 137

2. 권업신문사의 구성원

권업신문사의 구성원은 몇차례에 걸쳐 변동이 있었다.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

〝 시 기 〝 인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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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년 12월 17일 〝신문부장 겸 주필 신채호, 총무 한형권, 부원 박동원,

〝 이근용

〖〜〜〜〜〜〜〜〜〜〜〜〜〜〜〜〜〜〜〜〗〜〜〜〜〜〜〜〜〜〜〜〜〜〜〜〜〜〜〜〜〜〜〜〜〜〜〜〜〜〜〜〜〜〜〜〜〜〜〜〜〜〜〜〜〜〜〜〜〜〜〜〜〜〜〘

〝 1912년 2월 29일 〝 발행인 듀꼬프

〖〜〜〜〜〜〜〜〜〜〜〜〜〜〜〜〜〜〜〜〗〜〜〜〜〜〜〜〜〜〜〜〜〜〜〜〜〜〜〜〜〜〜〜〜〜〜〜〜〜〜〜〜〜〜〜〜〜〜〜〜〜〜〜〜〜〜〜〜〜〜〜〜〜〜〘

〝 1912년 12월 30일 〝 신문부장 한형권

〖〜〜〜〜〜〜〜〜〜〜〜〜〜〜〜〜〜〜〜〗〜〜〜〜〜〜〜〜〜〜〜〜〜〜〜〜〜〜〜〜〜〜〜〜〜〜〜〜〜〜〜〜〜〜〜〜〜〜〜〜〜〜〜〜〜〜〜〜〜〜〜〜〜〜〘

〝 1913년 10월 6일 〝 신문사장겸 주필 이상설

〖〜〜〜〜〜〜〜〜〜〜〜〜〜〜〜〜〜〜〜〗〜〜〜〜〜〜〜〜〜〜〜〜〜〜〜〜〜〜〜〜〜〜〜〜〜〜〜〜〜〜〜〜〜〜〜〜〜〜〜〜〜〜〜〜〜〜〜〜〜〜〜〜〜〜〘

〝 1914년 1월 19일 〝 신문사장 최병숙, 총무 윤해, 주필 김하구

〙〜〜〜〜〜〜〜〜〜〜〜〜〜〜〜〜〜〜〜〚〜〜〜〜〜〜〜〜〜〜〜〜〜〜〜〜〜〜〜〜〜〜〜〜〜〜〜〜〜〜〜〜〜〜〜〜〜〜〜〜〜〜〜〜〜〜〜〜〜〜〜〜〜〜〛

구성원들 가운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 신문의 주필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권업신문의 주필은 신채호, 그리고 후에 이상설, 김하구 등이 담당하였고 장도빈이 자주 기고하였다. 신채호는 국내에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의 주필을 역임한 인물이며

) 독립유공자공훈록편찬위원회, セ독립유공자공훈록ソ 1, 1986, p. 157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간행된 대양보의 주필 역시 역임한 당시의 대표적인 언론인이었다. 그는 권업신문 창간시부터 주필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913년에 상해의 신규식의 간절한 권유로 그해 겨울 북만주를 거쳐 상해로 갈 때까지 이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 오세창, ゛신채호의 해외언론활동-1910년대초 노령을 중심으로ゝ, セ단재신채호선생순국50주년추모논총ソ, 1986, p. 342 신채호가 상해로 떠난 이후 1913년 10월부터는 이상설이 그를 대신하여 신문의 주필을 담당하였다. 이상설은 헤이그 밀사의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로서 만주지역에 최초의 근대식 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설립한 인물기도 하다. 그리고 러시아로 망명한 이후에는 1910년의 일제의 조선 강점에 반대하여 13도의군과 성명회 등의 조직에 앞장선 인물이기도 하며,

) 윤병석, セ이상설전ソ, 일조각, 1984, pp. 127-147 서울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찍부터 <창폡자>라는 필명으로 신한민보는 물론

) 윤병석, ゛미주한인사회의 성립과 민족운동ゝ, 앞의 책, p. 367 권업신문에도 글을 기고 하였다. 권업신문에 기고한 대표적인 글로서는 1913년 8월 29일자 신문에 기고한 <이날은>이다.

김하구는 1907년에 러시아 지역에서 최초로 간행된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의 기자로 활약한 인물로서 일본의 조도전대학에서 공부하였다.

) 졸고, 해조신문, セ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ソ, 일조각, 1991, p. 310 그는 1910년 이종호의 재정적 도움으로 조도전대학 정치경제학과 3학년에 입학하여 1911년 졸업하였다. 동년 8월 귀국한 그는 기독교 보통학교의 교사로서 일하였으나 1912년에 7월에 사직하고 블라지보스또크로 망명하였다. 1913년 10월에는 블라지보스또크 한민학교 교사로서 근무하다가 권업신문사에 입사해서 外報의 번역을 담당하였다. 그는 로어, 일어, 영어, 독어, 중국어 등 각국의 언어에 능통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 セ在外排日鮮人有力者名溥ソ(하와이대학소장)

張道斌도 권업신문에서 논설을 작성하였다. 그는 평남 中化郡 출신으로 1906년에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08년에는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입학, 1910년 4회로 졸업하였다. 또한 1908년부터 1910년까지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으로 일하였으며 신민회에도 가입활동하였다. 1910년부터 1912년까지는 서울 인사동에 있는 五星學校의 학감으로 일하였다. 이 학교는 李甲과 이종호가 설립한 학교였다. 1912년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망명한 그는 이종호의 요청에 의하여 권업신문사에서 일하였다.

) 김중희편, セ汕耘 張道斌ソ, 산운학술문화재단, 1985, pp. 1-159 및 장도빈, 暗雲짙은 舊韓末, セ思想界ソ 1962년 4월호, pp. 284-291.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장도빈은 セ사상계ソ 1962년 4월호에 실린 그의 글 ゛暗雲 짙은 舊韓末ゝ에서,

내는 신한촌에 도착한 즉시로 신채호씨의 거소를 찾아가서 신씨를 만나니 신씨가 매우 반가워 환영하여 그곳서 식사를 하고 그날 밤으로 이종호씨, 이상설씨, 정재관씨를 방문하였다. 내가 이종호씨를 만나서 들은 즉 방금 ゛권업신문ゝ을 경영하게 되었으니 협력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하고 그 신문의 발행은 신채호씨에게서도 들어 알았으며 나는 아직 그 신문에 기고하기를 승낙하였다. 나는 그날부터 신채호씨와 한 여관에 유숙하여 수년간을 함께 있었다.

권업신문은 러시아정부의 허가를 얻어 권업회의 기관신문으로 하게 되었는데 그 신문과 권업회는 이종호씨의 경영으로 시작되어 그 후로 약 2,3년간 계속되었다. 나는 권업신문에 기고하여 발행배부 되었는데 노령, 간도, 상해, 북경, 신의주 각 방면으로 선전되었다.

라고 회고하고 있다.

권업신문의 발행인이자 편집인으로 활동한 듀꼬프는 블라지보스또크 동방학연구소 중국, 조선어과 졸업생으로서 당시 동시베리아 제3보병연대 중위였다.

) 박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 ゛국권피탈전후시기재소한인의 항일투쟁-러시아 망명한인들의 항일투쟁참가-ゝ,セ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ソ, 1992, p. 1063 그는 일찍부터 한국인들이 간행한 신문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즉 해조신문의 발행인겸 편집인,

) 졸고, 해조신문(개정분) 대동공보의 편집인으로 활동하였고

) 대동공보 1910년 6월 9일자 대양보의 발행인 겸 편집인인 유진률이 사임하자 그 후임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며

) セ노령이주상태ソ, p. 91 , 1912년 2월 29일 권업회의 명예회원으로 입회하였다.

)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

권업신문의 사장으로 활동한 인물로는 이상설과 최병숙을 들 수 있다. 이상설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고 崔炳肅에 대하여는 크게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12년 10월 6일자 권업신문 24호의 で고 이준공전기간행 유족구휼회と 의연금 모집회 발기인으로 활약한 인물로서 항일적 취지서를 기초한 자이며, 격렬한 항일주의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 セ노령이주상태ソ p. 150

최병숙의 항일의식과 관련하여 권업신문은 1912년 10월 6일자 별보에 실린 <고이준공전기간행유족구휼의연금모집회취지서>에서,

동포여 꿷각폁鏅가 우리 리쥰공을 꿷각폁鏅가 원슈의 일본을 ꟡셢폁고 조국의 국권을 회복폁랴다가 망망폅 폡외타국에셔 몸을 바린 리쥰공을 꿷각폁鏅가(중략) 이와갓치 나라를 위폁고 민족을 위폁야 졍신과 긔윤을 잇鏅韡로 다폁나 첫믡鏅 국민의 지식이 아직 유치폁고 둘믡鏅 원슈의 세력이 날로 물밀듯폁야 멸망의 비운이 이미 니마에 당폅지라. 이에 ゛장꿁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안으리라ゝ를 노鿡폁고 만리폷장을 차리고 밀꿁꿁명을 폑辁폁야 폡아만국평화회의에 향폁야 일본의 죄악을 셩토폁고 조국의 참상을 공포폁랴평꿡 오호라 텬일이 믡샹폁니 박뎨상의 츙의鏅 비록쟝렬폁나 시셰가 불리폁니 신포셔의 통곡이 또폅 무뎡폁도다. 분과 꽬흠과 절임과 압흠이 일시에 그 뇌를 찔러 드韡여 망망폅 이역에셔 렬렬폅 죽음을 일우엇도다

라고 쓰고 있다.

그 밖에 권업신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는 신문부장과 총무로 활동한 한형권과 윤해를 들 수 있다. 한형권은 대동공보의 로어번역을 담담하였던 인물로서

) 대동공보 1910년 4월 24일자 일찍부터 신문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권업회의 의원, 신문부 총무, 신문부장, 부의장, 부회장 등을 역임한 주요 인물이었다. 그밖에 그는 1910년 12월 18일 블라지보스또크에서 조직된 慈善共濟會에서 위원 및 규칙기초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 セ노령이주상태ソ, pp. 109-110 윤해는 1888년 함남 永興에서 출생한 인물이다.

) 독립유공자공훈록편찬위원회, セ독립유공자공훈록ソ 9, 1991, p. 298 그는 일찌기 延吉縣 局子街 道治 衙門의 통역, 간도 간민교육회 총무, 간도 小堂子 중학교 교사로서 만주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그후 블라지보스또크로 이전하여

) セ재외배일선인유력자명부ソ 권업 신문의 총무를 담당하였고, 그뿐만 아니라 권업신문에 <惠子>라는 명의로 많은 글을 발표하였는데, 1913년 3월 16일의 기서 <공론과 샤회>, 1913년 4월 4일자 기서 <꿁관교육과 루령청년의 됴흔 긔회>가 그 예이다. 1912년 6월 27일에는 블라지보스또크 이종호의 집에서 이종호, 신채호 등과 함께 러시아와 외교현안을 담판하기 위해 러시아의 수도로 가는 일본의 桂太郞을 암살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 오세창, 앞의 논문, p. 341 이를 파악한 러시아 당국에 의해 윤해는 7월 11일 경계 취체상 블라지보스또크 제4구 경찰분서에 구류되었다. 그 후 하바로브스크로 가서 이종호의 허락하에 그의 식객이 되었으며, 1914년 9월에 블라지보스또크로 돌아와 권업신문의 재간행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5년 2월에 東寧縣 삼차구에 가서 이종호의 집에 기거하였다.

) セ재외배일선인유력자명부ソ

결론적으로 권업신문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은 국내외에서 언론과 관계 있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즉,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대양보 등에서, 김하구는 해조신문에서, 한형권은 대동공보에서, 듀꼬프는 대동공보, 대양보 등에서 각각 활동하던 인물들이다.

권업신문은 동시대의 한인신문, 잡지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 같다. 권업신문 1913년 2월 23일자 논설 <국문샤믁긔의 원조>는 신한민보에 게재되었던 것이며, 권업신문 1914년 5월 3일 논설은 치따에서 간행되고 있던 대한인정교보 9호(1914년 3월 1일 발행)에 실린 <농촌계발의견>을 전재한 것이다. 그 밖에 권업신문에서는 일본외교시보를 번역하고 싣기도 하였다. 1913년 1월 12일자 역재 <일루관계론>, 1913년 8월 18일자 역재 <류령거류조선인문뎨> 등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외에 1913년 2월 2일자 역재 <민족쥬의>는 손문이 중국 민보 창간기념일에 연설한 것 중 민족주의에 관한 것만 따서 번역 게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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