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한인 독립운동
2010.08.31 14:23

권업회-1장 권업회의 조직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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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된 후 망국민이 된 러시아 연해주지역의 동포들은 재러동포들의 권익과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1911년 12월 19일(러시아력 12월 6일)

) 러시아력은 앞으로 で러と로 약하기로 한다. 블라지보스또크에서 勸業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한인들이 러시아에서 러시아당국의 공식인가를 받고 조직한 최초의 한인 단체로서, 1911년부터 1914년까지 4년동안 연흑룡주 지역의 대표적인 재러한인의 권익옹호기관이자 독립운동단체로서 활동하였다. 아울러 동시기에 자바이깔 치따지역에서 조직된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와 함께 러시아지역 한인 단체의 양대 산맥이었던 것이다.

권업회는 이처럼 재러한인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단체였으므로 학계에서도 일찍부터 주목하여 왔고,

) 윤병석, ゛1910년대 연해주지방에서의 한국독립운동ゝ, セ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ソ, 일조각, 1990. 그리하여 어느 정도의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는 거의 전적으로 일본 첩보기록 등에 의존하여 이들의 실체를 밝히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일제측자료는 물론 지금까지 활용되지 않았던 馱스크 극동문서보관소 등 러시아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권업회 관련 러시아측 보고자료, 권업신문 그리고 독립기념관에서 간행한 안창호일기 중 권업회 관련 편지 등을 적극 활용하여 권업회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검토는 지금까지 권업회에 대하여 알려지지 않은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 줄 것이며, 나아가 권업회의 성격 규정에 일익을 담당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본고에서는 권업회의 조직과 구성, 활동과 재정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권업회의 가장 중요한 활동이었던 권업신문의 발간에 대하여는 별도의 논고를 통하여 밝히고자 한다.

1. 권업회의 조직과 구성

1) 러시아의 대한인정책의 변화와 권업회의 설립

권업회의 성립배경은 권업회 성립 당시의 러일관계, 극동시베리아 총독의 대한인 정책, 재러독립운동가 및 재러동포들의 입장, 일본의 재러조선인 정책 등과 관련하여 조망되어져야 할 것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될 당시 러일관계는 상호 협력관계였다. 1910년 7월 4일 러시아와 일본은 제2차 러일협약의 체결을 통하여 미국의 만주 진출에 대항하여 러일양국이 공동전선을 구축, 만주에서의 양국의 특수이익을 적극적으로 천명하였다.

) 신승권, ゛러시아와 한국독립운동ゝ, セ한민족독립운동사ソ 6, 국사편찬위원회, 1989, p. 291 그러므로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 강점을 반대하지 않았고, 나아가 일본정부의 요청에 따라 한민족의 조선강점 반대투쟁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 劉孝鐘, ゛極東ロジアにおける朝鮮民族運動-゛韓國倂合ゝから 第一次世界大戰の勃發まで, セ朝鮮史硏究會論文集ソ 22, 1985, p. 144 즉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점되기 직전 재러동포들은 일제의 조선 강점에 대항하여 十三道義軍, 聲明會 등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거나, 또는 각국에 합방의 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8,624명이 서명한 성명회 선언서를 발송하여 이를 저지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친선관계를 갖고 있던 러시아는 일본의 항의에 따라 재러동포들의 이러한 움직임을 탄압하였으니 1910년 9월 이들 단체를 해체시킴은 물론

) 윤병석, 앞의 논문, pp. 181-182 한인 신문 대동공보 역시 폐간 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김정주, セ조선통치사료ソ 7, 한국사료연구소, 1971, p. 614

뿐만 아니라 러시아 당국에서는 일본측의 공작에 의하여

) 유효종, 앞의 논문, pp. 141-142 러시아내에서의 한국인들의 정치 활동 일체를 엄금하는 한편 1910년 8월 30일 블라지보스또크 경찰은 십삼도의군과 성명회의 지도자인 李奎豊 등 한인지도자 42명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동년 9월 말 이규풍, 金佐斗, 李範錫, 李致權 등 7명을 이르꾸쯔크(ܘ݂݀ܺ݃݁ܺ) 지역으로 추방하였다.

) 박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 ゛국권피탈전후시기 재소한인의 항일투쟁-러시아망명한인들의 항일투쟁참가-ゝ, セ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ソ, 1992, p. 1079, 한인신보 1917년 10월 14일 강동꼥해

이러한 가운데 1911년 6월 1일에는 두 정부의 공동이해에 의하여 で러일범인인도조약と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의 협상은 러시아가 1905년 혁명 이후 일본에 있는 정치적 망명가들의 활동을 억압하기 위해 제안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도 러시아 못지 않게 자신들의 정부에 대한 한인들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양국은 이 조약에 첨부된 비밀선언을 통하여 정치범의 인도를 규정하였다.

) 하라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운동ゝ, 서대숙엮음, 이서구 옮김, セ소비에트한인백년사ソ, 태암, 1989, p. 17 이 선언에 따라 러시아는 비록 한국독립운동가들을 일본에 인도하지는 않았지만 러시아 국적을 갖고 독립운동을 하는 한인들을 시베리아 등지로 유배 보냈으며, 한국국적 한인들은 러시아 국경 밖으로 추방하였다.

) 유효종, 앞의 논문, pp. 144-150 그 결과 러시아 내의 항일운동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 하라테루유키, 앞의 논문, p. 17

이러던 중 1911년에 조선인 경계론을 주장하던 운떼르베르게르의 후임으로

) 와다하루키, ゛소비에트 극동의 조선인들ゝ, セ소비에트한인백년사ソ, p. 46 한인들에 대하여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곤다찌(ܝ. ܛ. ܓܾܴ݂݂ܸܽܰ)가 沿黑龍州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당시의 총독은 이 지역 전반에 대한 행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 조선총독부, セ朝鮮彙報ソ 1918년 4월 西伯利號, p. 20 한국인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갖고 있는 인물이 총독으로 부임하는가 하는 점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새로이 부임한 곤다찌는 1909년부터 1910년에 걸쳐 러시아 정부의 명령을 받아 한인들이 정착하고 있는 아무르지역을 조사하였던 인물이다.

) 와다하루키, 앞의 논문, pp. 46-47 그리하여 한인에 대하여 나름대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즉 그는 한민족의 토착성과 임지개간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또한 그는 정부가 이들을 귀화시키고 병역의 의무를 부과한다면 러시아화는 어렵지 않다고 보았으며 한민족의 질 높은 노동력을 이용하여 극동 노령을 개발하고 반일민족운동을 지원함으로써 한민족을 완전히 그의 통제권안에 넣는 반면 후일 대일복수전에서도 효과적으로 그들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권업회의 조직, 운영 등에 있어서 러시아측의 기본 입장이었으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이러한 점은 연해주 군지사가 권업회 의회의 의결 사항을 그에게 보고하도록 권업회 회칙에 명문화시키고 있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 セ明治四十五年 六月調 露領沿海州移住鮮人の狀態ソ,(이하 노령이주상태로 약함), p. 98 이와 같은 입장이었던 곤다찌는 부임한 후 1911년 3월 23일에는 1910년 7월에 발표된 외국인 노동자 고용금지안을 철폐하였다. 또한 1909년 이래 금지되었던 한민족의 금광취업을 귀화신청을 제출한자에게는 허락하는 등 한인들에 대한 유화장책을 적극 전개하였다.

) 임계순, ゛만주 노령 동포사회ゝ, セ한민족독립운동사ソ2, 국사편찬위원회, 1987, pp. 610-611) 아울⧚ 그는 한인들의 귀화정책도 적극 추진하였다.

) 한국인의 귀화정책은 곤다찌의 조선인이용론외에 주변 상황 역시 크게 작용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일본 정부는 ぢ한일합방선언っ 제1조에 의거하여 1884년 러시아와 조선과의 조약은 종료되었으며, 이 조항에 기초하여 조선인은 비록 러시아 영내에 거주할 지라도 일본국민이 되었음을 천명하였다.(하라테루유키, 앞의 논문, p. 17) 그러므로 한국인이 러시아에 귀화하지 않을 경우 러일 양국간에 외교적인 마찰이 있을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재러한인들의 입장에서도 귀화의 필요성이 있었다. 즉 재러한인들 중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지 않은 한인들에 대하여 일본이 법적 권리를 주장하여 그들에 대한 취체 및 관할권을 주장할 경우 이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또한 한국인들은 러시아의 국적을 가질 경우 러시아로부터 받을 수 있는 여러가지 혜택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유효종, 앞의 논문, p. 143) 결국 러시아 당국과 한인들의 이해가 일치하여 한인들의 러시아 귀화가 급속도로 증가되었던 것이다.

곤다찌의 대한인유화정책은 권업신문 1913년 8월 31일자 譯載에 <일본외교시보>를 번역하여 실은 <루령거류죠션인문뎨>에,

루시아는 오鏉날 왕왕 죠선인을 보호폁야 툭폁면 우리의 쉢탁을 등지鏅 것과 갓폅 것은 일루친목에 韡폁야 우리鏅 섭섭폅 일이 업지못폁니 대诡 루시아 당국쟈가 죠선인에 韡폅 졍쏢이 어떠폁냐평 디경시면 지난 동안 극공총독은 누가왓던지 각각 의견이 갓지안엿鏅韡 즉금 곤다띠 총독은 극단으로 지나인을 ꟡셢폁면서도 죠선인이 루시아에 귀화폁鏅韡 韡폁야鏅 일죵 특례를 열어 일뎡폅 집이 잇거나 또 멋 폡되엿거나 이것을 물론폁고 입륢을 셷원폁鏅 동시에 귀화를 허가폁鏅 방법을 실폷폁며 또 죠션인 포용쥬의를 가진 것을 가히 알겟더라

라고 했듯이, 일본의 요구에 상반되게 대한인에 대한 포용주의 정책을 실행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중국인은 극단적으로 배척하면서도 한국인이 러시아에 귀화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히 배려하여 신청 즉시 귀화를 허락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곤다찌 총독은 1911년 일본과 맺은 러일범인인도조약도 제대로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1913년 8월 31일자 앞에 인용한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측에서는,

우리가 말코져 폁鏅 것은 다른데 잇지안코 곳 일루 범죄인 인도됴약을 힘써 실폷폁鏅것이 곳 원폁鏅 바라

이 됴약의 톄결은 당초 루시아의 간졀폅 요구에셔 나온 것으로 우리鏅 이에 응낙폅 것이라. 곳 일루젼믷뒤에 루시아 혁명당의 벌쳐름 니러남을 인폁야 폅 것이니 이에 韡폁야 우리도 또폅 죠션인의 졍치범인으로 루령에 드러간쟈를 잡아달라폁여야 리 됴약은 비로소 셩립된 것이라 평지니 이젼에 우리졍부에셔鏅 됴약 셩립젼에 됴흔뜻으로 루시아의 二대 국꿁범을 잡아 보鏡여 준것과 갓흔 꿁실이 잇鏅것을 불구폁고 루시아鏅 오鏉날 왕왕 죠션인을 보호폁야 툭폁면 우리의 쉢탁을 등지鏅것과 갓폅 것은 일루친목에 韡폁야 우리鏅 섭섭폅 일이 업지못폁니

라고 하면서 일본에 있는 러시아혁명가들을 체포하여 인도하는 대신에 러시아측이 한국인 정치적 망명자들을 체포 인도해 주기를 희망하였으나 이 계획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자 섭섭함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러시아 측이 항상 한국인의 편에만 섰던 것은 아니다. 러시아 당국은 기본적으로 외교적으로 일본과 우호관계를 맺어야할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안에 따라서는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예컨대 1913년 2월 21일(러)은 러시아 로마노프 황실 3백년 기념 경축일이었다. 이에 대하여 우수리 지역에 살고 있던 한인 동포들은 1913년 3월 9일 권업신문에 논설 <루시아황실삼꟢년긔념일경썂숑>을 게재하여 그 기념을 축하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하여 권업신문사 사주 이종호와 또 두사람이 한국인의 대표로 뻬쩨르부르크에 파견하려 하였는데 블라지보스또크 러시아 관헌의 제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 권업신문 1913년 8월 31일 역재 <루령거류죠션인문뎨> 이는 일본과의 외교적인 마찰을 고려한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일본은 러시아 곤다찌 총독의 대조선인 유화정책에 대하여 외교적 항의를 전개하는 한편, 조선총독부에서 고등관 2명을 항상 외교書記生이라는 명목으로 블라지보스또크에 파견하여 정탐활동을 추진하였다.

) 권업신문 1913년 8월 18일자

이러한 가운데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러시아 당국의 탄압에 의해 앞길을 가늠할 수 없었던 재러동포들은 곤다찌 총독이 부임한 기회를 이용하여 재러한인 사회의 발전을 추구하는 한편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조직은 러일간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면적으로는 독립운동단체라고 하더라도 표면적으로는 정치적인 색채를 띠어서는 안될 조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면의 독립운동단체는 러시아에서도 탄압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일본과 부드러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러일전쟁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적대감정이 항상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러시아 당국에서도 한국인들이 표면적으로는 실업이나 교육을 표방하더라도 내면적으로는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 당국은 한인을 전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한인 조직이 이루어지기를 내심 기대하였다. 왜냐하면 보다 러시아의 이익을 위해서 효과적으로 한인을 관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ܚܾ݃ܽ- ܞܿ- ܾܹ݅ /ܞܱ݂ܾ݉ܵ݁ܲ ܠܷܸ݂ܸܰܲݏ ܢܴ݀݃ܰ/(권업회, 馱스크 문서보관소 소장)

한편 러시아 당국에서는 만주에서 러시아와 대립하던 미국과 연관관계를 맺고 는 것으로 생각되는 국민회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도 가지고 있었다.

) 유효종, 앞의 논문, pp. 151-152 단체의 조직에 있어서 제일 문제로 부각되는 것이 한국인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출신지역에 따라 함경도파(북한파, 북파), 평안도파(서도파), 서울파(남도파)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함경도파는 李鍾浩, 崔在亨 등을 중심으로 하여 崔鳳俊, 洪範道, 趙昌浩, 兪鎭律, 崔萬學, 李尙雲, 김그레고리, 全(田)義根, 金奎涉, 韓馨權, 오와실리, 金秉學, 嚴仁燮, 金振祥, 金翼瑢, 田뽀또르, 趙璋元, 李春植 등이었고, 서울파는 李相卨을 중심으로 李範允, 金學萬, 柳麟錫, 李範錫, 尹逸柄, 金顯土, 安玉道 등이었다. 그리고 평안도파는 車錫輔를 중심으로 安昌浩, 金致甫, 申采浩, 李剛, 鄭在寬, 金成武, 高尙俊, 許郎將, 咸東喆, 崔寬屹, 安定根, 黃公道 등이었다.

) セ노령이주상태ソ, pp. 168-170.

이들은 러시아에 거주하는 자신의 출신지역 사람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당시의 러시아 거주 한인들의 출신지역 분포는 함경도, 평안도, 남한 출신의 순서로 많았다.

) 朝鮮總督府內務部社會科編, セ滿洲及西伯利亞に於ける朝鮮人事情ソ, 1923, p. 14.

이들 3개파 가운데 러시아 당국이 위험시하던 미국 국민회 계열인 평안도파는 함경도파의 압력에 의해 안창호가 미국으로 떠난 후 1911년 9월 경 그 중심인물인 정재관, 이강 등이 치따로 이동하였다.

) 졸고, で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의 성립과 활동(미발표논문)と 참조 이 당시 연해주지역에서는 이종호를 중심으로 한 함경도파와 이상설을 중심으로 한 서울파가 있었다.

2) 권업회의 조직과 구성원

1911년 6월 1일

)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 <권업회 연혁> 함경도파의 모임인 함북청년회의 회원인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セ도산안창호자료집(1)ソ, 1911년 6월 17일자로 백원보가 안창호와 이갑에게 보낸 편지 이종호, 金翼瑢, 姜宅熙, 엄인섭 등의 발기로

) セ노령이주상태ソ, p. 92 러시아 블라지보스또크 신한촌 조창호의 집에서 권업회의 발기회가 개최되었다.

)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

발기회에서는 먼저 임시임원을 선출하였다. 회장 崔在亨, 부회장 洪範圖, 총무 김익용, 서기 조창호, 재무 許太化, 의원 김그리고리, 엄인섭, 柳基燦, 오창환, 趙章元, 金起龍 , 金泰奉 등이었다.

)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 이들 구성원을 보면 주요 인물의 대부분이 함경도파였는데, 회장 최재형, 부회장 홍법도, 총무 김익용 등 주요 간부가 그 예이다.

) セ노령이주상태ソ, pp. 169-170 또한 이들은 의병과 애국 계몽운동 양면에 적극적이었던 최재형, 그리고 의병장으로서 널리 알려진 홍범도 등이 주요 위치에 있는 점으로 보아 운동노선상에 있어서 애국계몽운동 계열과 의병계열의 연합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그리고 임시사무소는 함경도파인 조창호의 집으로 하였다. 아울러 권업회에서는 지회설립 권유위원을 노보끼예브스크, 니꼴라예브스크(ܝܸܾܻܺܰܵܲ݁ܺ), 리포, 수청 등지에 파견하는 한편 이종호, 홍병일 등에게 러시아 관청에 교섭하여 러시아 극동 총독 곤다찌의 공식 허가를 얻도록 노력하게 하였다. 이를 위하여 권업회에서는 본회규칙인허를 순무부에 청원할 때 오로지 한인의 사업으로 러시아인과 협동한다는 뜻으로 뽀랴노브스키(ܑ. ܜ. ܟܾܻݏܾܸܹܽܲ݁ܺ)에게 그 규칙의 책임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

권업회 발기회는 1911년 7월 3일(러) 블라지보스또크의 청년들이 만든 靑年勤業會와 합하였다.

)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 이를 계기로 권업회 발기회는 그 세를 확장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어 임원개선이 이루어졌다. 회장 최재형, 총무 김익용, 서기 李瑾鎔, 김기룡, 재무 김와실리, 의원 金奎燮, 金亨權, 한형권, 李亨郁, 김치보, 조창호, 신문부원 이종호, 유진률 등이었다. 주요 간부의 구성을 보면 회장, 총무 등 기본 골격은 그대로 두었다. 즉 함경도파가 주요 직책을 계속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밖에 서기, 재무, 그리고 의원 가운데 김규섭, 김형권, 한형권, 이형욱, 김치보, 유진률 등이 새로 영입되었다. 이들 가운데 누가 청년근업회 출신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회장 최재형, 의원 김규섭, 신문부 유진률 등이 청년근업회에서 간행하는 신문인 大洋報의 주요 인물인 점을 보면

)セ노령이주상태ソ, pp. 87-88 ⧚들 역시 청년근업회의 구성원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대양보의 사장이었던 최재형이 권업회 발기시부터 회장에 취임한 것을 보면 최재형의 노력에 의해 이들 두 단체가 연합한 것이 아닌가 한다.

권업회 발기회에서는 청년근업회의 재정과 사업을 인수하였다. 1911년 7월 10일(러)에는 근업회 재정 905루블 90까뻬이까를 인수하였다.

)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 ⧚리고 근업회에서 1911년 6월 5일부터 간행하던

) セ노령이주상태ソ, p. 88 大洋報도 인수하였다.

)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

그밖에 비록 합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블라지보스또크 일대에서 활동하던 주요 단체와 권업회 발기인회와의 관계 역시 밀접한 것 같다. 1909년 9월 4일에 창립된 靑年敦義會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서 회장이 김치보였으며, 유진률이 이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セ倭政文書 甲九 在露韓人關係 明治四十三年 自一月至九月ソ, 1910년 1월 20일 보고 그들 양인 역시 권업회 발기회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거류민회는 1911년에 조직되었으며 회장은 김학만이었다. 이 단체는 1911년 6월 1일 단체의 명칭을 신한촌회로 개칭하였다.

) セ노령이주상태ソ, pp. 104-108 신한촌회의 주요 구성원 역시 권업회의 구성원과 유사하며, 그 결과 1914년 권업회에 흡수되었다.

) 권업신문 1914년 3월 22일자 1910년 11월 18일에 조직된 자선공제회는 회장에 김치보, 위원에 안창호, 김병학, 김현토, 고상준, 조창호, 한형권 등이었다.

) セ노령이주상태ソ, pp. 109-110 그들 역시 권업회의 발기인과 대동소이하다. 안중근유족구제회인 공동회는 권업회 발기인인 이종호의 추종자들로 구성된 단체이며

) セ노령이주상태ソ p. 100 , 구성원의 대부분이 북한파로서 귀화인으로 구성된 기독청년회는 권업회의 설립과 동시에 회원의 대부분이 권업회에 가입하였다.

) セ노령이주상태ソ, pp. 100-101

결국 권업회발기회는 권업회의 발기에 참여한 함북청년회의 함경도파를 중심으로 청년근업회 등이 합쳐 이루어진 단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렇게 조직된 권업회는 당시 블라지보스또크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인단체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한편 권업회는 점차 세를 확장해 나가는 가운데 블라지보스또크 지방재판소로부터 단체의 설립 허가를 받고,

) ܘܷܻܸܲܵ݇ܵܽܵ ܸܷ ܾ݂݂݇ܵܰ ܞܱ݂݉ܵ݁ܲܰ ܠܷܸ݂ܸܰܲݏ ܢܴ݀݃ܰ/ ܚܾ݃ܽ ܞܿ ܾܹ݅ ܷܰ 1911 ܸ 1912 ܳ. ܳ./(1911년-1912년까지의 권업회의 보고서 중에서 발췌, 뻬쩨르부르크 중앙국립역사문서보관국) 이어서 1911년 10월 24일(러)에는 러시아 연해주 지역인 한인 농민인 홍 빅또르 세르그페비치, 김 야코브 이바노비치, 홍 바벨 빠블로비치, 안 라만 이바노비치, 김 인노겐치 이바노비치 등 5명의 명의로 연해주 군지사에게 권업회의 공식 허가를 요청하였다.

) 1911년 10월 24일자로 홍 빅토르 세르그페비치 등 5명이 연해주 군지사에게 올린 청원서 (ܕܓܞ ܟܾܾܴܸ݂ܻ݀ܵܲ݁݅ܵ݌݂݁ܲ݃ ܓ. ܒܾܾܼܵܽܽ݃ ܓܱ݂ܾ݃ܵ݀ܽܰ݀݃ ܟܸܼܾܾܹ݀݀݁ܺ ܞܱܻ݂ܸܰ݁, 馱스크 문서보관소 소장) 이러한 가운데 러시아 당국에서는 한인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즉 연해주 순무사와 블라지워스또끄 헌병사령관 쉐르바코프(ܠ. ܟ. ܩܱܾܵ݀ܰܺܲ)등이 나서서 함경도파의 이종호 등에게 당시 경쟁적 관계에 있던 이상설 등 서울파와의 화해를 주선하였다. 러시아 당국은 권업회의 조직이 한인의 대표기관이길 원하였던 것이다.

) セ도산안창호자료집(1)ソ, p. 173. 1911년 12월 29일자로 백원보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이⧚ 평소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하여 연합의 필요성을 느껴오고 있던 함경도파와 서울파도 이를 계기로 권업회의 조직에 합의하였던 것 같다. 이에 권업회의 조직을 추진함에 있어 재러한인 모두의 대동단결을 추진한 권업회에서는 치따에 있던 평안도파에게도 권업회의 참여를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서울파의 중심인물인 이상설이 정재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기에 이르렀다.

청국 혁명 풍조에 감상을 得하야 조국참상을 애통하는 동시에 통일단합을 擧成코져 하는데 俄領당파는 鄭某 李某의 所爲라 하니 우선 同席議事하야 세인의 誣惑함을 벽파할 줄로 自認하고 如是 仰告하오니 속히 束裝來駕云云

) セ도산안창호자료(1)ソ, p. 56, 1912년 2월 12일자로 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또한 함경도파인 김익용 등도 평안도파로서 블라지보스또크에 남아 있던 백원보에게 친절을 표하여 정재관 등이 권업회에 참석할 것을 요청하는 등 권업회가 한인의 대표기관으로서 모양을 갖추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 セ도산안창호자료집(1)ソ, pp. 173-175. 1912년 3월 9일자로 백원보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이처럼 재러한인들 사이에 화해의 움직임이 있자, 러시아당국에서는 1911년 11월 10일(러) 러시아 부총독 5등문관 M.B. 모노마호프(Mܾܾܼܾܽܰ݅ܲ)의 주관하에 블라지보스또크 시장 마르가리또프(ܒ. ܟ. ܜܸ݂ܾܰ݀ܳܰ݀ܲ)와 블라디워스또크 첫번째 지역 과세조정원 까잔스끼이(ܟ. ܚܷܸܹܰܰܽ݁ܺ)등이 참석한 가운데 러시아황제가 승인한 1906년 3월 4일의 단체조직에 관한 법령에 따라 권업회를 공식 승인하였다.

) ܟܾ݂ܾܻܸ݁ܰܽܲܵܽܵ, ܟܸܼܾܾܾ݀݀݁ܺܳ ܞܱܻ݂ܾܾܰ݁ܽܳ ܾܿ ܴܻܼܵܰ ܾܱ ܾܱ݂݉ܵ݁ܲܰ݅ ܸ ܾ݁ݎܷܰ݅

ܸ݂݂ܸܿ݀݁݃݁ܲݏ(1911년 11월 10일자 연해주 지방 단체와 회의에 대한 결정서, 馱스크 문서보관소 소장) 그 결과 권업회는 권업신문 1914년 7월 26일자 논설 <권업회하반긔총회에 韡폁야>에,

권업회鏅 아령일韡에 흐텨져잇鏅 한국사鿑의 졍신을 통일폁며 꿷활을 지도폁鏅 오직한아인 꿷명긔관이라 이나라 관셷의 최혜镢 韡우를 얻고 공식인가로 셜립된지 발셔 삼사년동안에 꿁무의 진취가 아鿑다운 셩륢이 만폁며 인심의 졍돈이 곤칠바르 알게됨은 권업회의 셩镢이며 역시 우리 동포의 협력폅 바로다

라고 있듯이, 러시아 지역 일대에 흩어져 있는 한국 사람의 정신을 통일하며 생활을 지도하는 생명기관으로서 러시아 관청의 최혜국 대우를 받는 최초의 공식 기관으로서 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권업회는 러시아 당국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면 러시아 당국의 통제하에 들어가 있는 단체라는 의미와도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결국 권업회는 항일이라는 공감대 위에 한국인의 내적 요구, 즉 자치조직과 독립운동단체의 조직의 필요성과 그리고 러시아 곤다찌 총독이 러시아의 이익을 위하여 한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활용하려고 하는 입장이 서로 일치하여 표면적으로는 서로의 이해의 바탕위에서 조직된 단체라고 할 수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권업회의 활동과 조직 등은 러시아의 이익에 의하여 견제 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1911년 12월 19일에는

) 이날은 총독 곤다찌의 생일날이기도 하였다(ܒܾ ܒܻܴܸܾ݂ܾܾܰܲ݁ܺ݁ܺܵ ܾܹܾܺ݀ܵ݁ܺܵ

ܞܱ݂ܾ݉ܵ݁ܲ ܠܷܸ݂ܸܰܲݏ ܢܴ݀݃ܰ, 뽀드스따빈이 1912년 12월 20일자로 블라지워스또크 한인 권업회에 보낸 편지, 馱스크 문서보관소 소장) 블라지보스또크 신한촌 내 한민학교에서 권업회의 공식적인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권업회 추진 위원들의 당시에 이 회의에 참석하였던 백원보는 1911년 12월 29일자로 안창호에 보낸 편지에서,

본월 십구일에 권업회 총회라 하고 졸연히 개회하엿사온데 동지 중에는 弟가 참관하엿사온 즉, 임시 회장은 이상설이온데 규칙을 공포하옵는데 농· 공· 상· 학의 제업을 아령· 연해주 각처에 권장할 목적이오며 임원은 의사부 一部뿐이온데 全會事項을 일절 의사부에서 결정하야 총회의 승락을 득한 후 실행云云이옵고, 예외의 임원을 借御와 別部로 치하엿사오니 임원전체가 如下하오이다.

수총재 류인석, 총재 김학만, 최재형, 이범윤(此 소위 차어등류), 교육부장 정재관, 기록부장 이남기(의암의 老弟者 喪制로 단이든 이), 경용부장 조영진, 구제부장 고상준, 통신부장 김치보, 검사부장 윤일병, 사찰부장 홍범도, 종교부장 홍범도, 서적부장 신채호, 실업부장 최만학(레포), 응접부장 김만학(此 소위 별부) 의사부 의장 이상설, 부의장 이종호, 총무 한형권, 김익용, 회계 김니꼴라이(최반슈의 양자, 이종호를 숭배하는 청년), 서기 이민복, 의원 김중화, 이범석, 홍병훈(홍병일의 백씨), 임원은 이상과 如하오며 회장급 서기는 매회에 임시 선정케 하엿소이다.

) セ도산안창호자료(1)ソ, 1911년 12월 29일자로 백원보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pp. 172-173.

라고 하여 당시의 회의 정황과 임원의 선정 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권업회 창립총회에서는 임원을 선거하였는데, 의장 이상설, 부의장 이종호, 총무 김익용, 한형권, 재무 김기룡, 서기 이민복, 의원 이범석, 洪炳煥, 金萬松 등이었다. 즉 이종호, 이상설 등이 중심이 되어 권업회를 조직하였다. 이외에 특별임원을 선거하였는 데 수총재에 柳麟錫, 총재에 李範允, 김학만, 최재형, 崔鳳俊 등이었다.

) セ노령이주상태ソ, pp. 93-95,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 참조. 러시아측 자료 <권업회>와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에는 최봉준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주요 부서의 장을 임명하였는데 교육부장 정재관, 실업부장 최만학, 經用部長 조창호, 종교부장 黃公道, 선전부장 신채호, 검사부장 윤일병 , 통신부장 김치보, 응접부장 김병학, 기록부장 李南基, 사찰부장 홍범도, 구제부장 고상준 등이었다.

)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

이들 주요간부를 지역별로 분류해 보면 서울파, 평양파, 함경도파들이었으므로

) 윤병석, 앞의 논문, pp. 184-185 권업회는 그들의 연합조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사실 창립시에는 치따에 그 근거지를 두고 있었던 평앙파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 セ도산안창호자료(1)ソ, 1912년 7월 22일자로 백원보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pp. 183-184. 다만 권업회가 한인전체의 대표임을 알리기 위해 우선 그 대표의 한사람인 정재관의 이름을 싣고 있는 것이다. 또한 권업회에는 그때까지 블라지보스또크을 중심으로 하는 시베리아 한인 사회의 각계 각층의 중요 인물이 망라되었다. 최재형, 최봉준, 김학만, 김도여, 차석보, 김익용, 김병학 등은 러일전쟁 이전에 이주하여 그곳에서 경제적 토대를 장만하면서 정치, 경제적 지위를 획득한 부류이며, 이범윤, 홍범도, 유인석 등은 국내와 간도에서 항전하다 북상한 의병계열이었다. 그리고 정재관, 이상설, 이종호, 신채호 등은 국내와 그 밖의 지역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군대해산 전후로부터 그곳에 망명,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여 조국독립운동을 전개하던 계열이었다.

) 윤병석, 앞의 논문, pp. 181-186

그리고 이들 간부들 가운데 러시아에 귀화한 인물은 최재형, 최만학, 김병학, 윤일병, 김기룡 등이었고, 나머지 인물들은 한국 국적이었다.

) 권업회, 馱스크 문서보관소 소장

한편 권업회는 연해주의 러시아인 주요 인사들을 명예회원으로 가담시켰다. 연흑룡주 총독 곤다찌를 위시하여 연해주 군지사 마나낀 장군(M.M. ܜܸܰܽܰܺܽ), 블라지보스또크 연구기관 교수인 뽀드스따빈(ܓ. ܒ. ܟܾܴ݂ܸ݁ܰܲܽ), 러시아정교 주교감독국의 기관비서 뽀랴노브스키, 블라지보스또크 자치기관 회원이며 퇴역 참모부 준대위인 듀꼬프 등이 그들이다.

) 1911년- 1912년까지의 권업회의 보고서 중에서 발췌, 뻬쩨르브루크 중앙국립역사문서보관국소장

이처럼 권업회는 재러한인 세력의 총결집체로서 러시아 당국의 절대적인 지지하에 조직된 단체였다. 그리하여 권업회는 러시아 당국의 영향권 하에 있는 재러한인 사회의 대표기구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인들에게는 러시아의 영향을 어떻게 이용하면서 재러한인의 권익과 한인독립운동을 추진해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처럼 조직된 권업회의 宗旨는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재러동포에게 실업을 권장하며, 노동을 소개하고, 교육을 보급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단체가 명칭을 권업회라고 한 것은 일본의 방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으고, 사실상 이 단체는 독립운동기관이었다.

) セ아령실기ソ <권업회> 그러므로 권업회의 목적과 이념은 시베리아 한인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권업(경제)문제와 항일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항일(정치)명제를 결부시키는 전술을 취하면서 끝내는 조국독립을 달성하고자 하는 데 있었고,

) 윤병석, 앞의 논문, p. 186 이러한 권업회의 목적은 극동총독 곤다찌도 인가할 때 미리 알고 있었다. 노령 沿黑龍州 총독인 그는 1912년 2월 블라지보스또크 주재 大鳥일본총영사에게 한인 독립운동가, 권업신문, 권업회의 취체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았으며,

) 김정주, 앞의 책, p. 618 오히려 1912년 2월 16일(러) 자진해서 권업회의 명예회원이 되어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던 것이다.

)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 또한 창립 1주년에는 축하전문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 뽀드스따빈이 1912년 12월 20일자로 블라지워스또크 한인권업회에 보낸 편지, 馱스크 문서보관소 소장) 그뿐만 아니라 권업신문 1914년 2월 8일자 논설 <권업회신년쉷회>에서,

권업회鏅 루시아 법아鿡에 잇어 그 목镢은 더말평 것업시 우리가 항샹 꿁모폁鏅 극동쉷독 곤다띠씨가 권업회관안에셔 일반회원의게 권면폅 말 ゛한국을 사랑치안이폁鏅 꿁鿑은 루시아에셔도 원치안鏅 ꟢셩이라ゝ 을 긔역평지라도 우리한인된쟈鏅 뻬가 절이고 땀이 흘으鏅도다.

라고 하였다.

그 후 권업회에서는 몇번의 임원개선이 이루어졌다.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12년 4월 4일 제1회 총회시의 임원개선>

의장 최만학, 부의장 정재관, 총무 조창호, 서기 이근용, 김기룡, 재무 김와실리, 의원 윤일병, 金道汝, 김형권, 감사원 이상설, 이종호, 한형권, 金利演, 김만송

)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

<1912년 4월 15일의 임원개선>

의장만 최만학에서 이종호로 교체

)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

<1912년 8월 12일 하반기 정기총회>

의장 이상설, 부의장 한형권, 총무 김도여, 서기(러시아 문서) 朴永彬, 서기(한문문서) 이근용, 재무 김하구, 의원 황공도, 조창호, 윤일병, 검사원 이종호, 이범석, 엄인섭, 이형욱, 김이연

) 권업신문 1912년 9월1일, 12월 19일자

<1912년 12월 30일 본회 임원 총선거>

회장 김도여, 부회장 한형권, 총무 조장원, 재무 김학준, 한문서기 김하구, 러시아문 서기 박영빈, 의원 이상설, 정재관, 윤해, 검사원 崔文敬(겸), 조창호, 김태봉, 신문부장 한형권, 종람부장 조장원, 실업부장 이상설, 교육부장 정재관, 심사부장 김하구, 연론부장 尹海, 종교부장 황공도, 고본단총무 이상설, 농림위원장 이종호

) 권업신문 1913년 1월 19일자

<1913년 6월 30일 하반기 정기 총회 보궐선거>

총무겸 의원 韓史敎, 재무겸 의원 姜良吾

) 권업신문 1913년 7월 7일자

<1913년 10월 6일 특별총회>

회장 최재형, 총무 정재관, 신문사장 이상설(주필 겸임), 검사원 김와실리, 임시의사원 李東輝, 李東寧, 이종호

) 권업신문 1913년 10월 26일자

<1914년 1월 19일 정기총회>

회장 최재형, 부회장 정재관, 총무 조영진, 재무 강양오(의원 겸임), 서기 최의수, 김기룡, 의사원 강택희, 蔡成河, 이동녕, 김하구, 김기룡, 검사원 한형권, 이설, 김와실리 , 조장원, 김형권, 신문 사장 崔炳肅, 총무 윤해, 주필 김하구, 종교부장 咸世仁, 교육부장 吳周赫, 실업부장 이범석, 농림위원장 이종호, 종람부장 김와실리, 연론부장 한사교

) 권업신문 1914년 3월 22일자

<1914년 3월 2일 특별총회>

회장 김도여, 교육부장 김병흡, 위생부장 김태봉

) 권업신문 1914년 3월 22일자

<1914년 7월 6일 하반기 총회>

의사원 강택희 대신 김치보, 민사부장 조영진 대신 채성하

) 권업신문 1914년 7월 26일자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권업회의 임원은 창립총회 이후 수차례에 걸쳐 변동을 보이고 있다. 그 중 책임자인 의장 및 회장의 경우를 보면 이상설, 최만학, 이종호, 이상설, 김도여, 최재형, 김도여 등의 순으로 변동되었다. 이들 중 이상설의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함경도파이다. 그중에서도 이종호는 함경도 출신으로서 1907년 헤아밀사 준비차 이상설, 이준과 함께 러시아로 망명해 온 인물이지만,

) 한인신보 1917년 10월 7일 강동꼥해 김도여, 최재형 같은 인물은 이곳의 토착세력이었다. 따라서 권업회의 세력 변동은 처음에는 이상설, 이종호 등 정치적 망명자들에 의하 주도되었으나 1913년 후에는 함경도파 중에서도 토착세력의 영향력이 보다 크게 작용하였던 것 같다.

이와 같은 구성원을 갖고 있던 권업회는 구성원 상호 간에 내부의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 1913년 11월 9일 논설 <회라鏅것은 모돌회 걁 믁>에 당시 권업회의 상황에 대하여,

권업회의 셜립이 거연히 이쥬년이 갓가옴에 다쇼간 발젼이 되였다 평수가 잇으되 아직迁지 총회의 의결이 실시치 못폁며 아국관셷의 신용과 다릉 령디鏡 鏡디에 잇鏅 유지쟈의 희망을 만죡케 못폑은 그연고 어韡잇鏅요 아마도 한두가지뿐 안이로韡 페일언폁고 회를 반韡폁鏅쟈鏁 회를 찬셩폅는쟈가 다 모돌회 걁 믁의 뜻을 아지못폑에 잇다폁노라(중략) 권업회의 창립후에 회쟝이 리샹설, 리죵호, 김도여, 최믡형 제씨가 잇鏅韡 혹져씨 뭗 한사鿑을 위워 강졍이 잇鏅쟈鏅 간졉이鏁 직졉으로 회의 진보鿉 방해폁야 디방지회의 셜립과 믡졍의 우너조와 诡척등 뭗대꿁업에 영향이 륢지 안이폁니 이鏅 리샹설, 리죵호, 김도여, 최믡형, 져씨뭗 한사鿑으로 회인줄 알미니(중략) 우수리 디방에 단톄가 만흔韡 국민회도 잇스며, 본항에 작은것으로鏅 륙진파, 단우회, 리우회, 명우회가 잇스며 큰 것으로鏅 북파, 셔파, 남파가 잇셔 각기 입을 빗죽 거리며 눈을 흘겨보니 알지못거라.

라고 하여 인물별, 출신지역 별, 단체별 갈등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이상설파, 이종호파, 김도여파, 최재형파 등 인물 중심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지역별 갈등 역시 심했던 것이다.

즉, 권업회가 창립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종호가 이상설과 정재관을 이용하고자 한다고 하여 이들의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특히 이종호와 이상설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이에 정재관은 1912년 5월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자 하였다.

) セ도산안창호자료(1)ソ, 1912년 5월 12일자로 백원보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p. 179. 또한 1912년 9월에는 이상설이 평안도파인 金治官, 朴永甲 등을 일본 밀정으로 공격하여 평안도파와 갈등을 겪게 되었다.

) セ도산안창호자료(1)ソ, 1912년 9월 22일자로 백원보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pp. 186-187, 1912년 9월 23일자로 백원보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p. 190. 또한 1913년 1월에는 이종호가 회를 장악하여 서울파도 용납하지 않아 권업회는 이종호계통의 인물들이 모두 장악하였다.

) セ도산안창호자료(1)ソ, 1913년 1월 21자로 백원보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pp. 202-203. 그러한 가운데 권업회는 김도여, 최재형 등 함경도파들이 세력을 계속 장악하였으며 1913년 말에 이상설은 일제의 밀정으로 몰려 하바로브스크로 이동하게 되었다.

) 윤병석, セ이상설전ソ, 일조각, 1984, p. 153. 한편 이종호는 1913년 11월 경 재로동포와 러시아 당국과 갈등을 일으켜 러시아 관헌들이 그의 집을 압수수색하게 되자 이동휘가 이를 수습하기도 하였다.

) セ도산안창호자료(1)ソ, 1913년 11월 27일자로 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p. 80.

조직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1912년 11월 11일(러)부터 의장 명의를 회장으로 개칭한 점이다.

) 권업신문 1912년 12월 19일자 사실 권업회에서는 의사부가 주요 기관이었으며 의사부의 의장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여 왔다.

) セ노령이주상태ソ, pp. 98-99 그런데 이 시기부터 그 명칭이 의사부 의장에서 회장으로 변경되었고, 1912년 11월 11일부터는 의장이라는 명의는 보이지 않고 있다.

한편 권업회에서는 1914년 3월 9일자 명의로 신한촌 거류민회가 권업회와 합하겠다고 하는 청원을 가결하였다. 그리고 위생부를 특별히 설치하여 전에 거류민회에서 처리하던 신한촌의 청결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민학교의 권리는 교육부의 직할로 한다는 것을 가결하였다.

) 권업신문 1914년 3월 22일자 잡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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