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2010.08.31 23:30

심양학술회의 2010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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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역사박물관.JPG

918역사 박물관

 

 발표하는 박환교수.jpg

발표하는 모습

 서탑교회.JPG

서탑교회

 신빈현 영릉가.JPG

신빈현 영릉가

 신빈현 왕청문.JPG

신빈현 왕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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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봉장군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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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봉장군 순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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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녀투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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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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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IMG_2531.JPG IMG_2550.JPG

 

중국인민항일전쟁과 세계반파쇼전쟁 승리 65주년 학술연토회를 다녀와서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


1. 학술회의 참여와 9.18역사박물관 참관

2010년 8월 14일 오전 중국 심양에서 개최되는 학술회의에 참여하기 위하여 3박 4일 일정으로 심양으로 향하였다. 이 학술회의는 9.18역사박물관과 무순시 사회과학원이 공동주최 하는 학술회의로 우리측에서는 전 국가보훈처 보훈선야국장인 이선우, 전 안동지청장 이상준선생님과 필자가 참여하였다. 회의는 8월 15일 오전 9시부터 많은 청중들이 참여한 가운데 9.18역사박물관에서 개최되었다. 본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제들이 발표되었다.


민족항전과 세계반파쇼전쟁---무순시 역사학회 상무부회장 杜成安

요동항전과 중화민족의식의 각성-무순시 사회과학원 당사연구실 주임 王平魯

의병정신과 무장항일----전 국가보훈처 보훈선양국장 이선우

3.1운동이후 남만주 지역 한인독립운동과 군자금 모집 -『本邦人在留禁止關係雜件』을 중심으로->>                                             수원대학교 교수 박환

중국항전의 역사적 의의와 항전사의 연구방향-요녕대학 역사문화학원 교수 焦潤明

동북항일통일전선 발기인과 조직자-楊松--요녕성 당학교 교수 郭化光

중국인민항일전쟁과 세계반파쇼전쟁의 기점과 종점---9.18역사박물관 연구실 주임 高建

총결-----무순시 사회과학원 원장 傅波


본 학술회의에서, 이선우선생님은 중국 학자들에게 의병정신에 대하여 소개하여 큰 호응을 받았으며,  필자는 << 3.1운동이후 남만주 지역 한인독립운동과 군자금 모집 -『本邦人在留禁止關係雜件』을 중심으로->>를 발표하였다.  

 학술회의 후 필자는 91.8역사박물관을 관람하였다. 몇 년 전에 다녀간 적은 있지만 이 박물관에는 만주사변 이후 동북인민의 항쟁과 일제의 만행 등에 대하여 상세히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중국측 항일열사들의 사진과 연길 등 조선인들의 집단부락, 목단강에 있는 팔녀투강비의 옛 모습 등은 큰 도움이 되었다. 아울러 독립군 기지를 복원한 모습은 더욱 생동감이 있어 보였다.  관람하면서 만주지역의 항일운동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그동안 간과하였던 중국인사들과 국민들, 지역적 환경 등에 대한 검토가 아울러 이루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학술회의 장면


2. 양세봉장군의 유적을 찾아--신빈현

1 양세봉 장군 흉상

8월 16일 무순사회과학원 원장 傅波, 양세봉장군항일투쟁자료전시관 관장 全正革, 국민부 참사였던 김진성의 아들 김세룡, 전 국가보훈처 선양국장인 이선으, 전 안동보훈지청자인 이상준 선생님등과 함께 조선혁명군의 근거지인 신빈현 왕청문으로 향하였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새로 이전한 양세봉장군의 흉상과 그의 순국지, 그리고 항일투쟁의 현장 등을 살펴볼 계획이다. 8월 중순의 신빈은 장마 때문이 도로 이곳 저곳이 파괴되어 차량운행에 일정한 제한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분들의 협조로 답사가 가능할 수 있었다. 여러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우리 일행은 심양을 출발하여 撫順, 南雜木을 거쳐 신빈으로 향하였다. 곳곳에 물난리로 도로가 유실되는 등 안타까운 모습들을 접할 수 있었다. 멀리 영릉가가 보이고, 이어서 신빈현진이 나타났다. 이들 지역 모두 1930년대 양세봉 장군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이 일제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곳이어서 감개무량하였다. 신빈현진에서 申八均 장군이 전사한 동창대를 지나 우리 일행은 旺淸門으로 향하였다.

왕청문은 조선혁명군과 국민부의 본부가 있던 곳으로 지금도 조선족진으로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이다. 이곳은 길림성과 요녕성의 경계이며, 청원 통화 등 여러 곳으로 갈 수 있는 교통이 발달된 곳이다. 아울러 작은 연변이라고 불릴 정도로 조선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왕청문 조선족 소중학교(小中學校)가 있었는데  여기에 조선혁명당 등의 본부가 있었다

이곳 조선족학교에 양세봉 장군의 흉상이 서 있었으나 학생수가 줄어들어 폐교되는 바람에 흉상 또한 이전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학교의 폐교와 더불어 국민부시절 독립군 무관학교인 화홍학교가 있던 조선독립운동의 산실이 없어지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왕청문을  지나 마을이 잘 보이는 언덕에서 왕청문진 전경을 여러 장 촬영하였다. 언덕위에는 국민당 군인들과 전투하다 사망한 팔로군들을 추모하는 비석이  서 있었다. 주변은 정화되어 있지 못하였고, 소들이 한가한 휴식 장소로 변하여 안타까운 마음 더하였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들이 이렇게 망각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향수하자 방향으로 좀 이동하여 비포장도로로 좌회전하여 올라가니 언덕에서 멀리 장군이 우리 일행은 반가이 맞이해 주고 있었다. 심양에 있는 기업인 독지가의 후원으로 왕청문진 강남촌 大夾皮溝에 흉상에 이전 건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직 정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주변에 기념관 등 시설들이 조속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양세봉장군을 기리기 위한 동포들의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선우 전 국가보훈처 선양국장, 부파 무순사회과학원 원장, 이상준 전 국가보훈처 안동지청장 등의 헌화와 묵념이 있었다. 1930년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중국인들과 더불어 함께 공동대일투쟁을 전개한 양세봉 장군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더 가슴에 새길 수 있는 기회였다.


2) 양세봉 장군의 순국지 답사

우리일행은 그곳에서 다시 향수하자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장마로 파괴된 곳들이 종종 눈에 띠었다. 다리를 건너가는 도중에 전정혁씨가 우리 일행에게 골자기 한곳을 가르켰다. 양정우 장군과 양세봉장군이 연합을 논의했단 依木樹溝라고 한다. 국내로 돌아와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문헌기록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 일대가 양세봉장군의 활동 거점이다 보니 골자기마다 항일유적지가 아닌 곳이 없는 듯 하다.

우리 일행은 다시 차를 몰아 향수하자 바로 못미쳐 좌회전을 하였다. 이곳에서 500미터 쯤 비포장도로로 이동하니 小荒溝 마을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200미터쯤 길을 따라 올라가니 두갈레 길이 등장하였다. 우측으로는 통화 강산, 좌측으로는 신빈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좌우에는 옥수수밭이 있었다.

당시 양세봉은 그를 따르는 독립군 장령과 동포들로 부터 '군신(軍神)'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유능한 사령관 및 철저한 동포의 보호자로서 신망을 얻었다. 일본군 밀정 박창해(朴昌海)가 평소에 양세봉 총사령관과 친면이 있고, 혁명군에 대하여 직접 간접으로 후원하고 있던 중국인 왕씨(일설 압동양(壓東洋)이란 자를 매수하여 중국인 사령관이 양세봉을 만나 군사문제 등을 협의하기로 요청한다고 유인하게 하였다.  1934년 9월 19일 총사령관 양세봉이 중국인 왕모(王某)를 비롯한 부관들과 신빈현 왕청문의 사령부를 떠나 남쪽 방향의 향수하자향 환인현(현재 신빈현) 小荒溝촌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길 왼쪽의 수수밭에서  일행을 포위, 양세봉은 심한 부상을 당하였다.

전정혁씨는 부상당한 장군은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하전자마을에 와서 치료받던 중 사망하였다고 한다. 하전자 마을은 현재 없어지고 그 뒤로 멀리 장군의 시신을 묻었다는 고구려산성이 보였다. 그러나 장군의 시신을 일본군들이 파해처 김도선의 집에서 작두로 목을 쳤다는 천인공노할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3) 紅廟子 가는 길

우리 일행은 점심 식사를 위하여 왕청문을 지나 신빈현진을 지나 홍묘자로 향하였다. 이쪽길은 환인현으로 향하는 길로 대단위 임업단지였다. 항일전투의 근거지가 되었음직한 곳이라 생각되었다. 신빈현진에서 1시간 가량 이동하니 홍묘자 長岺子村이 나타났다. 이곳은 전라남도 장흥사람들이 1937,8년경 이주하여 개척한 곳이라고 전정혁씨는 말하였다. 그의 장인이 이곳 출신이라고 한다, 장흥에서 신의주로 신의주에서 심양, 남잡목까지 기차로, 다시 남잡목에서 신빈현진까지 목탄차로 이동한 후 다시 도보로 이동하여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장영자촌에서 맛있은 늦은 점심을  먹고, 양세봉 장군이 전투를 전개한 정령지역과 그가 처음 정착한 영릉가 근처 老城 南村을 보았다.

양세봉은 1896년 (일부 자료에는 1894년) 6월 5일 (음력)평안북도 철산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나, 모친의 이름은 김아계(金阿桂)였다고 전하다. 양세봉은 어려운 가정형편 가운데서도 10세 무렵부터 4∼5년 동안 마을의 서당을 다니며 천자문과『명심보감(明心寶鑑)』등 기초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하지만 1912년 아버지가 타계하여 가세가 기울자 장남이었던 그는 가족들과 함께 중국 요녕성 흥경현(興京縣 : 지금의 신빈현)으로 이주하여 소작농으로 일하며 생계를 떠맡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이주 정착한 마을이 노성 남촌으로 추정된다,

이번 답사를 통하여 유적지에 대한 정확한 위치비정과 체계적인 관리, 표지석 설치 등이 시급한 과제로 느껴졌다, 아울러 한중 학자들의 공동연구 또한 시급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1. 하얼빈 안중근 기념관

  2. 2012년 하얼빈

  3. 2011년 7월 교감선생님들과 만주 답사 #2

  4. 2011년 7월 교감선생님들과 만주 답사

  5. 심양학술회의 2010년 8월 15일

  6. 2010년 7월 만주답사(교장단)

  7. 2009 청산리역사대장정 교원팀

  8. 2009년 2월 북만주, 송일국, 청산리대첩 기념비

  9. 2007년 독립유공자 후손 항일독립운동사적지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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